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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맞는 거 같은데…?”

진만은 손에 든 메모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광역시 외곽에 있는 아파트 단지 정문 앞이었다. 정문 바로 옆에는 ‘하나로 마트’가 있고, ‘LH세탁소’가 있었다. 그 외 다른 상가는 모두 문이 닫혀 있었다.

“512동이라며? 바로 저기 있네, 뭐.”

정용이 턱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정문 경비실 뒤편, 아직 잎이 돋아나지 않은 플라타너스 가지 사이로 마치 오래된 교과서의 겉표지에 적혀 있는 듯한 숫자 ‘5’와 ‘1’과 ‘2’가 보였다. 가로등이 깜빡깜빡 수선을 피우며 들어오고 있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진만과 정용은 512동 3, 4라인 입구 계단에 앉았다.

“얼굴도 모르고 핸폰 번호도 모른다는 거지?”

정용이 묻자, 진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구 계단 옆 화단에는 개나리꽃이 한창이었다. 개나리꽃 때문인지 남루하고 조용한 아파트 단지는 어쩐지 더 쓸쓸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럼 누군지 어떻게 알아보려고?”

“그냥 느낌이지 뭐. 난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거 같은데.”

진만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김 사장한테 꼬박꼬박 형님이라고 불렀고, 어쨌든 자기 사업을 했던 사람이니까 서른 살은 넘었을 터. 30대 중반의 남자. 전직 돈가스 전문집 사장 최현수씨.

진만은 1년 전 출장 뷔페 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미처 받지 못한 임금이 있었다. 열하루 치 일당에 추가 근무수당까지 총 76만8000원. 그를 고용했던 김 사장은 매일 일이 끝나면 남은 음식을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알바생 한 명 한 명의 손에 쥐여줬던 사람이었다. 진만은 그곳에서 6개월가량 일했는데, 일당도 밀리는 법이 없었고, 추가 근무에 대한 수당도 정확했다. 어느 고등학교 동문회 모임에서 만난 진상 고객(술에 취한 채 알바생에게 계속 자기네 교가를 부르라고 했다)도 김 사장이 나서서 말려주었다.

문제는 마지막 한 달이었다. 김 사장이 아닌 방 실장이라는 사람이 대신 전화를 걸어와 알바 스케줄을 잡더니, 어느 날 그마저도 끊기고 말았다. 김 사장의 전화는 계속 꺼져 있는 상태였고, 찾아가본 사무실도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에이 씨,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진만은 지방고용노동청에 신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주저하지 않았을 텐데, 김 사장은 좀 아니었다. 어쨌든 6개월 동안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진만의 마음처럼 한 달 정도 지난 뒤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 진만아, 내가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말없이 떠나왔거든. 내가 너 밀린 임금하고 계좌번호 알고 있으니까, 빠른 시간 안에 해결해줄게. 정말 미안해.

진만은 김 사장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6개월, 8개월이 넘도록 진만의 계좌에는 아무런 돈도 입금되지 않았다. 이건 그냥 내가 고소할까 봐 시간을 끄는 것은 아닐까? 진만에게 76만8000원은 큰돈이었다. 원룸 월세 두 달 치가 넘는 돈이었다. 월말이 되면 진만은 늘 그 돈을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 주말, 김 사장에게서 다시 메일이 도착했다.

- 여기 이 주소로 가면 최현수라고, 돈가스 전문집 하던 친구가 살고 있을 거야. 나한테 300만 원 정도 줄 돈이 있는데, 거기에서 85만 원을 너한테 먼저 주라고 그랬어. 그 친구도 갑자기 가게를 접는 바람에 연락이 계속 안 닿았거든. 엊그제 연락이 닿아서 너 얘기해 놨으니까 가면 돈을 줄 거야. 늦어서 미안하다, 진만아.

“근데 왜 나까지 데리고 온 거야. 너 혼자 받으면 되지?”

정용이 조금 짜증 난 목소리로 물었다.

“지난달에 네가 방값 10만 원 더 냈잖아. 그거 그냥 바로 주려고.”

“이건 뭐… 다 물고 물려 있구나.”

최현수씨는 밤 8시가 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동안 3, 4라인으로 들어간 사람은 초등학교 아이 두 명이 전부였다. 진만과 정용은 스마트폰으로 프로야구 경기를 보면서 최현수씨를 기다렸다. 봄밤이었지만, 허벅지 아래로 계속 한기가 느껴졌다.

밤 9시쯤, 택배 트럭 한 대가 주차장에 섰다. H택배 유니폼 조끼를 입은 남자가 조수석에 잠들어 있던 남자아이를 업고 내리는 것이 보였다. 남자아이는 유치원 가방을 메고 있었다. 진만은 그가 최현수씨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봤다.

“저기, 김성오 사장님이 찾아가보라고 해서 왔는데….”

최현수씨는 잠깐 진만과 정용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선 짙은 땀 냄새가 났다. 그의 등 뒤에 업혀 있던 아이가 눈을 떴다.

“주말쯤 오실 줄 알았는데…. 일단 저쪽으로 가시죠.”

최현수씨는 아파트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이가 “아빠, 누구야?”라고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만과 정용은 느릿느릿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아이 때문에…. 진만은 어쩐지 자기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

하나로 마트 옆 ATM기에 들어갔다 나온 최현수씨는 진만에게 은행봉투를 내밀었다.

“그게 80만 원이거든요. 5만 원은 계좌번호를 적어주시면 다음 주에 바로 보내드릴게요.”

최현수씨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아이는 계속 진만을 쳐다보았다. 정용이 툭, 진만의 옆구리를 쳤다.

“아, 아닌데…. 뭔가 착오가 있나 봐요. 제가 받을 돈은 정확히 76만8000원이거든요.”

진만은 봉투에서 1만 원짜리 세 장을 꺼내 최현수씨에게 내밀었다. 2000원은 따로 자신의 지갑에서 꺼내 맞췄다. 그러곤 정용과 함께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뒤돌아섰다.

진만은 생각했다. 왜 받아낼 것이 없는 사람끼리 서로 받아내려고 애쓰는가? 왜 없는 사람끼리만 서로 물고 물려 있는가? 우리가 뭐 뱀인가? 개나리꽃만 지천인 밤이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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