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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한국정치를 휩쓸고 지나갔다. 고용 쇼크, 소득 분배 악화, 경제성장 하락, 국정 지지율 추락에 홍역을 앓았다. 겉보기에 지금 한국 정치는 숫자 폭풍을 견디고 멀쩡히 살아남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국적 현실을 감안할 때 정치가 언제 다시 숫자에 휘청거릴지 알 수 없다. 정치는 숫자를 다루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주먹구구의 한국 정치에 숫자가 발언권을 갖게 된 건 분명 좋은 소식이다. 너무 오랫동안 한국 정치는 설명할 수 없는 의견, 근거 없는 주장, 방증할 수 없는 당위론에 사로잡혔다. 이런 정치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숫자의 합리성일 것이다. 숫자는 복잡한 현상이나 잘 드러나지 않는 실체를 눈에 보이는 사실로 압축해주는 힘이 있다. 하지만 한국 정치가 고용률과 소득 분배율을 대하는 방식은 합리성과 거리가 있다. 고용률 부진을 알리는 숫자는 정책 재검토든 고용 구조 개선이든 해결책을 요구한다. 그런데 여야는 이런 문제를 안중에 두지 않는다. 여권은 단기 일자리라도 늘려서 숫자를 채우고 싶어 한다. 야당은 물러나라고만 한다. 가계 소득 분배가 악화됐다는 숫자가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여야는 불평등 완화 방안에 초점을 두고 이 숫자를 다루지 않았다. 여권은 표본 오류 주장, 통계청장 경질이 말해주듯 불평등 문제를 통계기술 및 인사 문제로 대체했다. 이번에도 야당은 물러나라는 소리뿐이었다. 숫자가 권력투쟁의 도구로 동원된 것이다. 한국정치에 내재한 비합리성이 숫자의 합리성을 밀어낸 결과다. 모든 숫자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복잡한 현실을 드러내기에는 너무 단순한 숫자도 있다. 경제성장률이 좋은 예다. 한국 사회에는 3.0%를 넘으면 국정에 성공한 것이고 2.9% 성장이면 실패했다는 식의 인식이 퍼져 있다. 하지만 양극화된 사회 현실을 고려하면 그것은 현실과 괴리된 채 표류하는 공허한 숫자다. 두 숫자의 차이는 실제 서민의 삶이 어떤지 말해주지 못한다. 숫자는 손에 집히는 게 없는 고도의 추상성을 띨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런 경우이다.

국정 지지율도 삶과 일치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지지율이 80%였다고 삶이 그만큼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40%였다고 더 나빠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여권은 오르락내리락하는 변덕스러운 숫자를 끌어올리고, 붙잡아 두는 일에 많은 자원을 투입한다. 지지율은 다른 모든 숫자를 대표하고 압도하는 숫자 중의 숫자, 숫자의 왕이다. 고용률, 소득분배율, 경제성장률 모두 지지율에 종속된다. 지지율에 기여하지 않는 숫자는 열등한 존재로 취급된다. 집권세력이 원하는 것은 ‘나중에 좋은 숫자’가 아니라 ‘지금 괜찮은 숫자’다. 그런 숫자는 실상이 어떻든 잘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숫자는 숫자라는 이유만으로도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당장 숫자로 내놓을 수 없는 것도 있다. 고용 개선을 위한 경제 생태계 조성, 불평등 완화를 위한 사회개혁과 같은 중장기 과제가 그런 것이다. 정부가 이런 문제에 집중한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

이 또한 숫자의 힘을 믿기에 채택할 수 있는 전략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왜 규제완화, 재벌 의존, 그린벨트 내 주택건설 추진 등 보수정부의 정책을 계승하는지 설명해준다. 과학소설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이런 내용이 있다. 슈퍼컴퓨터에 ‘인생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컴퓨터는 750만년 동안 계산한 끝에 ‘42’를 출력한다. 알 수 없는 숫자다. 42가 무엇인지 또 답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것은 곧 인생은 무엇인가라는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숫자로 축약할 수 없는 질문 앞에서는 스스로 물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도 스스로 물어야 할 게 있다. 국가의 행로는 미리 정해져 있어서 정권 교체에도 변경불가인가? 여야가 단기 숫자에 매달리는 동안 국가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오래전부터 가던 길을 그대로 가고 있다. 집권자가 국가의 고삐를 쥐고 있는 게 아니라, 국가가 집권자의 고삐를 쥐고 있는 것 같다. 정권교체해도 국가의 진로가 크게 바뀌는 일이 드물기는 하다. 문재인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이성론’이 있다. 국가가 자기 생존을 위해 스스로 필요한 일을 하고 집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에는 특별한 임무가 주어져 있다는 믿음이 여전하다. 그 믿음에 따르면, 개혁의 필요성을 웅변하는 숫자는 무시하고,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숫자에는 집착하고, 숫자로 환원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는 방치하는 현상이 해명되지 않는다. 집권자는 주권자의 의사를 대리하는 존재다. 그런데 국가에 주권자의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다면 정치란 과연 무엇인가?

 

<이대근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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