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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이런 e메일을 받는다. 

“야구 기자가 되려면 어떤 학과를 가야 하나요?

메일 제목을 보며 한참 생각을 한다. 질문 앞에 두 글자를 붙여주고 싶다. ‘좋은 야구 기자가 되려면 어떤 학과를 가야 하나요?’ 사실 큰 차이는 없다. 답변에도 차이는 없다. “어차피, 야구 기자 학과는 없습니다라고 답을 하려다 백스페이스, 백스페이스, 백스페이스.(검색해보니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에는 스포츠 저널리즘 학사 과정이 있다)

스포츠에는 일종의 ‘조기 교육 신화’가 존재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재능을 드러내고, 특정 종목의 ‘한 우물’을 판 끝에 챔피언이 될 수 있었다는 신화가 재생산되고 강화되는 세계다. 

타이거 우즈가 대표적이다. 3세 때 골프 신동으로 TV에 출연했고, 같은 해 집 근처 정규 골프장 9홀을 돌면서 11오버파를 기록했다(18홀 기준 94타!). 8세 때 처음 정규코스 80타를 깼고(18홀을 80타 이하로 쳤다는 뜻), 11세 때 아버지를 이겼고, 12세 때 70타를 깼다. 생후 7개월부터 보행기를 탈 때 퍼터를 끌고 다닌 ‘천부적 재능’은 우즈가 ‘골프 황제’가 된 비결로 믿어진다.

많은 이들이 우즈를 꿈꾼다. 재능을 찾고, 어릴 때부터 ‘올인’을 통해 대박을 꿈꾼다. 심지어 훈련과 대회 참가를 위해 학교도 포기한다. 노력과 끈기는 절대 윤리다.

올인보다 다양한 경험이 나을 수도

스포츠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엡스타인은 책 <Range>(‘늦깎이 천재들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에서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가능한 한 늦게 전문 영역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적었다. 체계가 엉성한 환경에서 다양한 스포츠를 경험하는 ‘샘플링 기간’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이 과정에서 몸을 쓰는 기술들을 폭넓게 습득할 수 있고, 그다음에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알 수 있다. ‘조기 재능 발견→한 우물 올인’ 전략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이 성공을 위한 더욱 핵심적인 전략이라는 얘기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림을 그린 것은 생애 말년의 약 2년이었다. 미술 중개업과 기숙학교 보조교사, 서점 점원을 거쳐 선교사가 됐다. 모든 분야에서 실패한 뒤 33세 때 미술학원에 갔지만, 드로잉에 대해 혹평을 받았다. 고흐의 실험적 그림은 오랜 ‘샘플링 기간’ 덕분이었다.

2022시즌 62홈런으로 아메리칸리그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바꾼 에런 저지(뉴욕 양키스)도 야구에 올인하지 않았다. 고교시절 농구, 풋볼, 야구를 오가는 키 2m의 덩치 큰 선수였다. 풋볼 시즌이 끝날 때쯤이면 “아유 지겨워, 빨리 농구 시즌 왔으면 좋겠다고 투덜댔고, 농구 시즌이 시작되면 “코트 왔다갔다 뛰는 거 정말 지겨워, 야구는 언제 시작하지라고 묻던 소년이었다. 정작 야구 시즌이 되면 “풋볼 시즌 언제 오나라고 생각하는 천진난만 학생 선수. 대학에 가서야 ‘야구만 하는 선수’가 됐다. 농구와 풋볼, 야구를 두루 하면서 ‘몸을 제대로 쓰는 법’을 배웠고, 야구에 집중하면서 야구용 기술을 더했다. 저지의 성공 비결이다.

세상은 점점 집중화, 전문화를 강조한다. 한 우물 파는 데도 인생이 모자란 듯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한 번 우물을 파기 시작하면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마케팅 ‘구루’로 평가받는 세스 고딘은 ‘매몰비용 오류’를 지적한다. 무언가에 시간이나 돈을 투자하면, 거기에서 손 떼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시간이나 돈을 낭비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 시간과 돈은 이미 사라진 다음이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투자를 더하고(물타기) 더 큰 손해를 볼수록, 결국 잘될 것이라 우기면서 계속한다.

잘못 판 ‘한 우물’ 사회적 비용 늘려

정치적, 사회적으로 매몰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대통령실 이전 비용은 계속해서 늘어나는 중이다. ‘여성가족부 폐지’ 선언에 매몰되면서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라는 기이한 조직이 나타나게 생겼다. ‘바이든’이 ‘날리면’으로 고집스럽게 바뀌고 이를 방송사 탓으로 몰아가는 일 역시 매몰비용의 오류다. 잘못 판 ‘한 우물’은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킨다. 그 중력에서 벗어날 초속 11.2㎞의 ‘용기’가 필요하다.

답장을 쓴다. 

“전공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경험을 할수록 야구를 더 넓게 볼 수 있습니다. 야구 기자는 공을 좇는 이가 아니라 공을 던지고 치는 사람을 보는 이들이니까요. 그다음에 더 좋은 야구 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noda@kyunghyang.com>

 

 

연재 | 이용균의 초속 11.2㎞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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