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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부분 좋든 싫든 평생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름을 바꾸는 절차가 쉬워졌다고는 하지만 ‘후남’이라든지 ‘막딸’이라든지 이름을 들으면 사연을 알 것 같은 사람들, 독특한 이름으로 어린 시절 놀림을 받은 경험을 가진 이들은 바람은 간절해도 여간해서 이름을 바꿀 용기를 내지 못한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름으로 표현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 국민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는 사태의 주인공들이 이름을 자주 바꾸었다는 것은 여러 생각을 들게 한다.

식물의 이름에도 만만치 않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나같이 식물분류학을 전공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만, 식물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학문은 식물의 정확한 이름을 아는 것이 연구의 시작이다. 모습이 매우 비슷한 식물들도 종(種)이 서로 다르면 사는 곳이나 방법이 아주 다른 경우가 있기 때문에 훌륭한 연구 성과를 내고도 엉뚱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말을 가리키며 소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식물은 우리말을 비롯하여 각각의 언어에 따라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있다. 우리말에서도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있다. 다만, 학명(學名)은 전 세계가 쓰는 공통의 이름이다.

우리말 식물 이름 이야기를 해보자. 많은 이들이 처음 식물에 어떻게 이름이 붙었을까 궁금해한다. 식물 이름은 한자로 식물명을 표기하던 본초학, 그리고 우리 민족의 생활에 활용됐던 식물의 이름이 등장하는 일부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현대적 의미의 식물분류학이 도입된 이후 1937년 발간된 <조선식물향명집>이란 책에서 체계적으로 정리된 식물들의 이름을 만날 수 있다. 상당수는 오래전부터 불리던 우리 식물 이름이 기존 기록에서 옮겨지거나 채록된 것이었지만, 우리말 이름이 없는 식물의 경우 일본 이름을 번역해 그대로 한국명으로 정하거나 그마저도 오역된 경우가 많아 부끄럽기 그지없다.

최근에는 새로 발견된 식물(신종 또는 미기록종)은 발표 방식만 올바르다면 발견한 사람이 직접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식물을 처음 접했을 때, 배경들이 모두 다르다보니 한 식물을 두고 제각각 부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맞춤법이 달라지면서 표기가 바뀌기도 하고, 학자들이 주관에 따라 바꾸기도 해 혼란은 가중됐다. 예전에 가장 저명한 학자들이 저술한 권위 있는 식물도감 3권에 실린 식물명을 비교한 적이 있는데, 3권에 실린 식물명이 일치한 경우는 49%에 불과할 정도였다.

소나무의 경우 ‘소나무’ 말고도 나무의 껍질이 붉다 하여 적송(赤松), 육지에 주로 분포한다 하여 육송(陸松), 우리말 이름인 ‘솔’ 등 여러 별칭이 있다. 일부 어른들 가운데 소나무를 적송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있는데, 이는 한일병합 직전 고시한 ‘화한한명’(和韓漢名) 대조표에서 일본식 이름으로 강제한 것이니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잘 이용했던 식물일수록 많은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 가시가 많은 ‘음나무’는 어느 국회의원이 “우리 고향에서 ‘엄나무’라고 했는데 왜 바뀌었냐”고 질의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음나무는 엄나무에 비해 전국적으로 널리 쓰이는 이름이다.

혼란을 줄여보고자 산림청 국립수목원과 한국식물분류학회는 ‘국가표준식물목록’을 작성해 추천명을 제시하고 있다. 목록심의위원들이 의견을 좁히는 과정에서 가장 오랫동안 논쟁한 것 가운데 하나는 야생 난초의 하나인 ‘복주머니난’이었다. 오래전부터 쓰인 원래 이름인 ‘개불알꽃’이라고 부르기 거북하다 하여 나중에 학자가 고쳐 부른 경우이다. 이에 대해 선조들이 귀한 자식을 개똥이라고 불렀듯 귀한 꽃에 장난스럽게 붙인 이름을 바꾸면 안된다는 의견과 그래도 너무 심한 이름이라는 의견이 팽팽했다.

가로수로 많이 심는 플라타너스는 우리말 이름이 ‘버즘나무’이다. 나무의 껍질이 피부에 버즘이 핀 것처럼 얼룩얼룩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북한에서는 열매의 특징을 따서 ‘방울나무’라고 하는데 통일이 돼 양쪽 식물 이름을 조정해야 한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나무만큼은 후자에 한 표를 던져야 한다는 이들도 있다.

식물 이름을 둘러싼 논란이 많다 보니  한때 나는 ‘식물은 그 실체로 존재하는데 사람들이 임의로 정한 이름이 뭐 그리 중요한가’라는 어설픈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름은 참 중요한다. 담임 선생님이 새 학기에 학생들의 이름을 가장 먼저 외우는 이유가 바로 학생을 한 명 한 명을 알아가기 위함일 것이다.

푸른 숲에서 내가 구분하고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나무나 풀이 10가지만 돼도 자연이 얼마나 정다운 공간이 될까! 식물 이름을 기억하는 데 약간의 시간을 쓴다면, 그 이름들은 평생토록 풍요롭게 나의 삶을 채워줄 텐데! 욕심부리지 말고 일년에 하나, 그래서 내 나이만큼만이라도 식물 이름을 알게 된다면 그 이름들은 내 마음에 자라며 절대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진정한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적어도 수시로 이름을 바꾸고, 권력으로 이름을 부풀린 사람들이 주는 상처를 입을 염려는 전혀 없다.

이유미 |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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