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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공약으로 그칠 줄 알았던 문화예산 2%가 국정과제로 확정됐다. 늘 자금조달에 시달리는 문화계가 이제 숨 좀 돌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문화융성이 4대 국정기조로 설정되고, 대통령 직속으로 문화융성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문화의 위상이 조금은 높아진 듯했고, 부처 간 협력이 아쉬웠던 사안들이 잘 해결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졌다. 유진룡 전 차관이 초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임명되고, 김동호 위원장이 문화융성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우려했던 편가르기는 없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일말의 기대는 끝을 알 수 없는 절망으로 바뀌었다. 2014년 5월 청와대가 작성하여 문체부에 전달했다는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문화예술인은 무려 9473명이나 된다.

블랙리스트의 작동방식을 유형화해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번째 유형은 문화시설에서의 유통을 막는 것이다. 공연·상연 또는 전시 공간을 빌려주는 대관심사에서 탈락시키거나 이미 대관된 것이라도 공연이나 상영을 중단시켰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산하 공연예술센터의 <이 아이> 공연 취소, 서울연극제 대관심의 탈락 등이다. 이는 공공영역뿐만 아니라 민간영역에서도 이루어졌다. 메가박스의 <천안함 프로젝트> 상영 중단, 문예 월간지 ‘현대문학’의 이제하·정찬·서정인 소설 연재 중단, 롯데시네마 등의 <다이빙벨> 상영 거부 등이다.

두번째 유형은 공공문화기관의 기획전시 및 공연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기획사업은 예술감독을 위촉해 만드는데 이들의 전문적 판단에 개입한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전에서 임옥상 작품 배제, 광주비엔날레에서 홍성담 작가의 ‘세월오월’ 전시유보 결정, 국립국악원 <소월산천> 공연에서 박근형 연출가 제외 요구 등이다. 이 경우 해당 작가뿐만 아니라 기획을 책임진 예술감독의 공통사퇴로 이어졌다.

세번째 유형은 공공지원 및 투자에서 배제함으로써 제작을 막는 것이다. 공공지원과 투자심사는 동료심사(peer review)제도에 의해 이루어진다. 동료심사제도는 전문성을 요구하는 문화, 과학, 학술 분야에서 일반화된 것이다. 그런데 문화예술위원회 지원심의에서 박근형 연출가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이윤택 작가의 <꽃을 바치는 시간>이 탈락했다. 동료심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위원회가 이를 뒤집은 것이다. 2016년 기획재정부가 공고한 ‘국고보조금 통합관리지침’에는 ‘불법시위를 주최 또는 주도한 단체의 경우는 보조사업자 선정에서 제외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명시됐다.

블랙리스트를 관철시키지 못하면 강력한 보복조치가 이루어졌다. 2014년 7월 후임 장관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진룡 장관이 면직되었을 때, 마지막 둑이 무너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시그널은 확실하고 단호했다. 김희범 차관과 박민권 차관이 연이어 경질되고, 프랑스장식미술전 개최를 거부한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은 해임되었다. <다이빙벨>을 상영한 부산영화제에 대한 정부 지원금은 절반으로 삭감됐고, 부산시는 이용관 집행위원장을 고발했다. 지원심사 때 협조하지 않은 심의위원은 다시 부르지 않았다. 민간기업에 대한 압력도 이루어졌다. 야권 후보에 우호적이었다는 이유로 청와대가 CJ그룹 부회장의 경영퇴진을 종용했다고 한다. 장차관이 경질되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고도 “나쁜 사람”으로 몰려 쫓겨나는 것을 본 조직에서 누가 저항할 수 있겠는가.

민주화 이전의 검열은 사전심의제도에 의한 것이었다.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사전심의는 법적 근거가 철폐되면서 사라졌다. 현 정부의 검열은 예술행정시스템에 의한 것이다. 예술지원기관 자체가 예술검열기구화한 것이다. 검열은 작품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 창작과 유통의 전 과정에 걸쳐 이뤄졌다. 그리고 문화계에서는 자기검열이 내면화되고 있다. 창의성은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는 태도이자 능력이다. 비판 없는 창의와 자유 없는 문화가 가져올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하다.

양현미 | 상명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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