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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비무장지대(DMZ).”

지난주 민통선이었던 강원 양구 펀치볼에 개원한 ‘국립수목원 DMZ자생식물원’의 허태임 인턴연구원이 쓴 글의 첫 문장이다. 허 연구원은 지난 7년간 철색 사이를 누비며 DMZ와 인근 지역의 생태를 두루 조사하고, 그곳의 풀과 나무들의 씨앗을 하나하나 받아 키워왔다.

허 연구원이 쓴 글을 읽고 보니 정말 그러했다. 말 그대로 DMZ, 무장이 해제된 지역인데 가장 첨예한 남북의 군사적 대립과 긴장, 갈등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렇게 60여년이 지나면서 간섭이 배제된 그곳은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며 동식물의 낙원이자 생태계의 보고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내용을 알면 알수록, 한반도의 동서를 가로지른 중요한 생태축이라는 말이 전혀 무색하지 않다.

백두산과 DMZ 대암산 용늪에서만 자라는 비로용담이 보랏빛 꽃을 피우고 있다.

동서의 끝 해안을 시작으로 농경지, 하천, 습지, 산림생태계가 허 연구원의 말처럼 스펙트럼처럼 펼쳐진다. 온대 중부와 북부의 식생이 공존하고 남방계와 북방계 식물이 서로 한곳에서 만난다. 대암산 용늪이라는 고층습원에서는 백두산과 이곳에만 자라는 비로용담이 보랏빛 꽃을 피워낸다. 멸종위기종인 산양을 비롯해 사향노루를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림청 국립수목원이 펴낸 <DMZ 인문자연 환경백서>에 따르면 이곳에 우리나라 전체 포유류의 52%, 조류의 51%, 양서파충류의 71%, 어류의 12%가 살고 있다. 또한 식물은 2382종류로 절반 이상을 차지하니 ‘생태계의 보물창고’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DMZ는 아픈 일면도 간직하고 있다. DMZ에는 최고의 고층습원 용늪, 산양도 쉽게 만날 수 있는 도솔산, 한국의 에델바이스로 불리는 솜다리 종류가 자라는 향로봉, 대청부채와 기암으로 멋진 백령도, 동식물이 공존하는 철원평야 등 천혜의 지역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많은 지역이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맞불을 놓아야 하고, 제초작업도 해야 한다. 사람의 이동을 제한하기 위한 철책은 동물들의 이동을 제한하기도 한다. 작전상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는 일이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하다보니 군사시설이 들어서기도 하고 군사도로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여기에 자연재해가 겹치면 산사태가 자주 발생하고, 이러저러한 시설로 자연이 훼손된 상태로 방치돼 있기도 하다.

DMZ에는 귀화식물도 제법 많다. 지역 주민들도 원주민이나 고향이 북한인 분들이 많을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지역 건설을 위해 전국 곳곳에서 외지인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지역 특유의 전통문화가 단절될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자연적, 인문지리학적, 군사적인 특성들이 조화롭게 맞물리지 않고, 제각각인 경우가 많아 막연하게 DMZ의 이상적인 자연생태를 기대하고 이곳을 찾은 사람들 중에는 “실망했다”고 말하는 분들도 적지 않다.  

이처럼 DMZ는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어떤 한 면만 보고 맹목적인 칭송을 하거나 무조건적인 평가절하를 하며 논란을 키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동안 몰랐던 다른 두 얼굴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어떻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느냐를 놓고 머리를 맞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미 민북지역 산지복원을 비롯한 여러 일들이 시작됐다. 국립수목원 자생식물원도 자연생태 복원 때 다른 곳에서 외래종자를 들여오지 않고 있다. 더디더라도 DMZ 생태계 복원과 보전을 위해 모든 종자는 이곳에서 채종해 키우고 있다. 안보관광과 생태관광이 함께 만나고, 접경지역의 역사는 특별한 가치를 지닐 수 있도록 DMZ 자료를 모은 도서관과 국제회의장을 마련할 방침이다.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이다. 그 어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지고, 고민도 깊어진다. 나무 사이를 걸으며 실타래처럼 얽혀 쉽게 풀어질 것 같지 않은 생각들로 혼란스러웠는데, 수목원을 찾아 깊을 대로 깊어진 단풍빛과 만나는 사람들을 보았다. 많은 이들은 아름다운 단풍빛으로 잠시 시름을 잊고, 행복해했다. 그렇게 자연은 사람을 위로하는 힘을 가졌다.

영국 고령토 폐광지에 세계적인 식물원을 만든 ‘이든 프로젝트(Eden project)’의 연구부장를 맡고 있는 마이클 몬더 박사는 오랫동안 종자에서부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를 정성스레 키워냈다. 그는 북한의 식물 복원까지 준비하고 있는 DMZ자생식물원을 보고 “식물원이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곳”이라고 평가했다.

많은 사람들이 DMZ의 여러 얼굴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아픔의 흔적들은 보듬고 가꿔 나가는 일에 동참했으면 한다. DMZ를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통일을 꿈꾸는 곳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유미 |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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