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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에 사로잡힐 때면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는데, 도스토옙스키와 발자크이다. 그들의 소설은 인간학으로 통할 만큼, 그들은 어둡고 비밀스러운 인간의 내면을 탐사하는 데 필생(筆生)을 바쳤다.
<악령>은 도스토옙스키가 필사적으로 매달린 인간의 망집(妄執)에 대한 소설적인 기록으로, 역설적으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1860년대 제정 러시아 말기의 광적인 혼란 상황을 악마적인 허무주의자 스타브로긴과 이상적인 급진론자 베르호벤스키, 필연적인 자살론자 키릴로프 같은 청년들의 욕망과 행태를 통해 희화화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악령이란 기형적인 사상과 파괴적인 행동으로 스스로 파멸에 이른 일당을 뜻한다. ‘홀린’ 사람들, ‘들린’ 사람들이 그들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은 광란의 시대와 그 시대를 비이성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모순적인 청년들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는, 정화(淨化)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나귀 가죽>은 발자크가 검 대신 펜으로 인간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야망으로 쓴 총체소설 <인간희극>의 출발점으로 ‘소원을 들어주는 마법의 가죽’ 이야기이다. <나귀 가죽>의 주인공 역시 <악령>의 스타브로긴이나 키릴로프처럼 발랑댕이라는 청년이다.
발랑댕은 1830년 7월 혁명이 휩쓸고 지나간 파리에 살고 있다. 당시는 혼란 속에 새로운 체제를 모색하는 과도기로 정치 과잉의 시대, 자본 과욕의 시대이다.
발랑댕은 실연(失戀)의 상처로 생(生)의 의미를 잃고 자살 생각뿐이다. 사랑하는 여인 페도라에게 바친 과도한 열정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페도라를 통한 사교계, 곧 세계로의 진입이 무위로 끝났기 때문이다.
오직 죽음의 악령에 들려 있는 그 앞에 웬 골동품상 노인이 나타나 솔깃한 제안을 하는데, 내용인즉슨, 노인이 건네는 가죽을 가지고 원하는 것을 빌면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 죽어가던 청년 발랑댕은 페도라를 향한 정념으로 나귀 가죽을 손에 넣는데, 이때 노인이 단서를 단다. 소원을 말할 때마다 그만큼 목숨이 줄어든다는 것. 발자크가 <나귀 가죽>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욕망하되, 대가를 치르라는 것.
소설은, 세간에서 쉽게 말하듯, 한갓 지어낸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도스토옙스키와 발자크가 평생을 바친바, 소설은 인간을 이해하는 척도이자 진실을 향한 지난한 길이다. 19세기 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한 악령 들린 사람들이 연일 우리 앞에 불려나오고 있다. 무소불위로 저지른 죄의 대가를 제대로 치르게 할 수 있을지 염려하며 두 눈 뜨고 지켜보는 것조차 고통이고 지옥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 상처 입은 마음을 보듬어 위로하고, 한 줌의 도덕이나마 소중히 지키며, 정상적인 삶을 회복하기 위한 연대(連帶)를 구축할 때이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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