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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성남시장의 광화문 단식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 시장의 문제 제기는 국가의 지방재정 개편 정책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 싸움은 일파만파 커질 가능성이 크다. 지방자치를 제대로 실현하기 위한 싸움이 시작되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이재명 시장의 말처럼 지방자치는 김대중 대통령이 살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키웠다. 그런데 밑으로부터 ‘자치’의 물결이 일어난 적은 없다.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원들이 몇 차례 지방자치 발전 과제를 들고 나와 목소리를 높이기는 했으나 번번이 좌절하고 말았다. 자치분권운동은 지방정치인의 힘에 기댄 거간정치 수준을 넘지 못하였던 터라 지방정치인들이 퇴각하면 허둥지둥 그 뒤를 따르고 말았다. 지방정치인들은 기세를 올리다가도 공천 날짜가 다가오면 하나 둘 꽁무니를 뺐기 때문에 지방자치 발전을 위한 투쟁은 물결을 이루지 못했다.

지난 주말, 이 시장의 단식을 지지하기 위해 모인 수만 명의 시민들을 보면서 이번에는 뭔가 다르지 않을까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시장은 간단히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았고 시민들의 함성은 힘이 넘쳤다. ‘지방’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지방자치의 시대정신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 시장의 저항은 지방재정 제도를 왜곡시키지 말라는 것인데, 지방자치를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를 계기로 국가와 지방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틀이 바로잡히기를 바라고 있다. 국가와 지방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생각의 틀이란, ‘국가가 지방을 만든 것이 아니라 지방이 모여 국가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지방의 힘만으로 하지 못하는 일을 하려고 국가를 만든 것이라는 말이다. 이를 ‘보충성의 원리’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국가-지방의 관계는 이런 원리와 거리가 멀다.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단지 운영의 편의를 위해 약간의 권한을 지방에 나누어주고 있는 형국이다.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이 지방자치를 폐지한 후, 국가와 지방의 관계는 그렇게 뒤집힌 상태로 유지되어왔다.

민주화 과정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단식으로 지방자치를 부활시킨 것은 그런 관계를 바로잡아놓겠다는 뜻이었다. 그로부터 수 십 년이 지났다. 그러나 국가와 지방의 관계는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 시·도지사, 시장·군수·구청장을 주민의 손으로 뽑고, 이를 견제할 지방의회도 주민의 손으로 구성했지만 ‘자치’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까마득하다.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선출하도록 했으면 ‘지방’이 자신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이 자신의 뜻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보잘 것 없다. 조직, 재정, 인사 등에서 지방은 ‘자치’를 한다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정부의 지방재정개편에 반대하는 무기한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_ 경향DB


국가가 온갖 생색을 내면서 넘겨주었다는 것도 내용을 들여다보면 가관이다. 최악의 경우이지만, 과제는 떠넘기면서 그것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권한과 돈은 주지 않아 지방이 골탕을 먹고 있는 누리과정 사업과 같은 복지서비스가 그 대표적 사례다.

우리나라의 모든 권력은 국가에 있다. 그리고 그 권력이 소재하는 곳에 돈, 사람, 일자리, 문화, 기회가 동심원을 이루며 모여 있다. 그곳을 우리는 중앙이라고 말한다. 중앙은 권력의 정점을 말하는 동시에 그 권력이 놓여있는 장소를 가리킨다. 그 ‘중앙’과 짝을 이루는 것이 ‘지방’이다. 우리나라에서 ‘지방’이란 말은 별 볼 일 없는 것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쓰인다. 지방을 ‘식민지’라고 한 강준만 교수의 지적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지방이란 말에는 편견과 차별의 의미가 잔뜩 묻어있다. 술자리와 같은 모임에서 주목을 요청하기 위해 ‘지방방송 꺼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왜 하필 ‘지방’방송인가? 여기에서 ‘지방’이란 쓸데없는 것, 중요하지 않은 것을 뜻한다. 이런 말은, ‘지방’이란 뭔가 모자라는 것이라는 편견을 강화하고, 권력도 자원도 없는 ‘지방’의 현실을 정당화한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그냥 들어 넘길 수 없다.

‘지방’대학이라는 말도 그렇다. 수도에 소재하지 않은 대학을 굳이 ‘지방’대학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세계 유수의 대학들은 모두 ‘지방’대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만 ‘지방’대학이라는 말을 쓰는가? 지방의 재발견이라는 말은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 것 같다.

우리나라에는 분명히 ‘지방’에 대한 잘못된 생각의 틀이 있고 그것과 맞물려 있는 잘못된 구조적 현실이 있다. 이재명 성남시장의 광화문 단식이 정부의 지방재정 개편 정책에 대한 저항을 넘어 ‘지방’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틀과 구조적 모순을 바로잡는 풀뿌리민주주의 혁명의 물결이 되었으면 좋겠다.



김태일 |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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