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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길거리에 한 청년이 이한열 열사의 영정을 들고 서 있다. 가슴을 누르는 역사의 무게 때문인지 몸을 가누기조차 힘겨워 보인다. 연세대 총학생회장 우상호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 그 청년은 바리케이드를 넘어 국회의사당 발코니로 자리를 옮겨 우뚝 서 있다. 그는 더불어민주당의 원내대표가 되었다.

더민주 우상호 원내대표를 필두로 ‘86그룹’의 부상이 드디어 주목을 받고 있다. ‘드디어’라고 말하는 것은, 이 그룹의 동향은 오래전부터 정치사회에서 관심거리였기 때문이다. 학생운동, 민주화운동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정치사회에 진입한 이들은 다른 어떤 그룹보다 강한 단결력을 보였고, 진보적 비전의 담지자를 자임하면서 대오를 형성해왔다. 따라서 이 그룹이 어떤 역할을 할지는 한국 정치의 미래를 가늠하는 흥미 있는 관전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지지부진한 정치사회에 의미 있는 흐름이 될지, 아니면 그렇고 그런 에피소드로 끝나고 말지.

현재로서는 기대만큼이나 걱정도 큰 것 같다. 이 그룹이 걸어온 길이 신통치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그룹 스스로 고백한 바이기도 하다.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다음해 봄, ‘86그룹’이 주최한 토론회가 열렸다. 주제는 ‘진보행동의 성찰과 민주당의 혁신방안’이었다. 총선·대선 패배 후, 책임 떠넘기기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성찰을 자임한 토론회는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여기에서 ‘86그룹’은 자신들의 부족함에 대해 반성한다고 했다. 용기 있는 발언이었다.

무엇을 반성한다고 하는지 들어보았다. ①정치혁신의 실패 ②독자적 비전과 아젠다 설정의 실패 ③국민의 신임 약화 ④총선·대선 패배의 책임이라고 했다. 정곡을 찌르는 자기성찰이었다. 2000년, 2004년 총선부터 야당을 혁신할 젊은피로 수혈되었던 이 그룹에는 이미 좋지 않은 별명이 붙어 있었다. ‘숙주정치’라는 말이 그것이다. 뚜렷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하지도 못하면서 기존 계파정치에 편입되어 좋은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는 조롱이었다. ‘86그룹’은 자신들을 폄훼하는 그런 말까지도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당내 권력구조 속에서 하청정치를 했다는 표현도 스스럼없이 했다. 그리고 중대선언을 발표했다. ‘계파정치’의 청산을 위해서 먼저 자신들의 모임인 ‘진보행동’부터 해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486이라는 과거 인연으로 모임을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신임 원내대표 인터뷰_연합뉴스

쉽지 않은 얘기였다. 훌륭했다. 그러나 ‘때늦은 성찰’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해체 선언으로 새로운 흐름이 다양하게 나타나기를 바란다고 말했으나 여의도에서는 아무런 흐름도 생기지 않았다. 그동안 무수히 제기됐던 ‘86그룹’에 대한 비판과 기대를 생각하면 이러한 성찰은 때늦은 것이 분명했다. 그 선언에 공감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진정성 있는 것으로, 혹은 실효성 있는 것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너무 먼 미래’였다. ‘86그룹’ 자신들도 진보행동을 해체한다고 선언하는 계파활동의 ‘현장부재증명’만으로 정치사회가 바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86그룹’은 계파활동의 현장부재증명만 제출하고 지금까지 ‘잠수’했다. 더민주가 겉과 속이 뒤집어지는 혼란을 겪고 있을 때도 이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86그룹’에 거는 기대만큼 염려가 크다는 것이다. 이 그룹이 낡은 정치문화를 바꿀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든지, 그래서 남을 가르치려고 한다든지, 순혈주의를 내세워 기득권을 끼리끼리 나누어 갖는 자폐집단이 됐다든지, 비전은 어디 가고 연줄관계만 남아 있는 빛바랜 깃발만 들고 있다든지, 이런 따가운 비판에 제대로 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우상호 원내대표가 ‘운동권을 넘어선 운동권’을 만들겠다고 천명한 것은 그런 시선에 대한 답으로 적절하지만 과연 잘할 수 있을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운동권을 넘어선 운동권’을 만들지 못한 것은 최장집 교수께서 일찍이 지적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탓이라고도 볼 수 있다. ‘86그룹’이 바리케이드의 정치에서 이룬 성과를 발코니의 정치에서도 잘 이어가기를 기대한다. ‘86그룹’에 그런 기대는 아예 하지 말라는 사람도 있다.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전하는 말이다.


김태일 |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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