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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처음 유권자로 편입된 고3생들의 선거권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속출하고 있다. 고3 교실의 원활한 선거권 행사를 옥죄는 법령과 해석이 나오더니 6일에는 중앙선관위가 서울시교육청이 추진하는 학교 내 모의선거 교육을 원천적으로 불허하는 결정을 내렸다. 진보 성향의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마치 해서는 안될 일을 강행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보수 쪽 시각에 손을 들어준 셈이 되었다. 

고3 유권자를 위협하는 가장 황당한 사례는 공직선거법 제106조(누구든지 선거운동을 위하여 호별로 방문할 수 없다 등)에 대한 선관위 해석이다. 지난달 선관위가 발표한 지침에 따르면 고3 유권자는 SNS 활동을 통해서나 개별적으로는 후보 지지 발언을 할 수 있다. 다만, 대중을 상대로 연단에서 공개 지지연설은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개인적인 선거운동도 두 개 학급을 연속으로 다니면서 하면 법 위반이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법을 위반할 수 있다. 다른 학생이 이를 고발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 투표권 하나 얻었다가 졸지에 이력서에 빨간 줄이 그어질 수 있다. 교사들도 위험하기는 매한가지다. 공무원의 중립을 요구한 공직선거법에 따라 국공립 교원의 후보 지지 활동은 당연히 금지된다. 그런데 사립학교 교원들은 애매하다. 어디까지 허용되고 어떤 것은 금지되는지를 구체적 상황에서 매번 따져봐야 한다.

더 답답한 것은 교내 모의선거 교육을 둘러싼 선관위와 서울시교육청의 논쟁이다. 당초 양쪽 말을 들어보면 두 기관의 입장이 정면충돌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교육청 관계자는 최근 “현행법을 위반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민주시민 교육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은 아니다”라고 했다. 초·중·고교 등 40개 학교에서 실시해온 교육을 계속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정치적인 중립을 지킨다는 원칙과 입장은 확고했다. 조 교육감이 전교조 교사들을 동원해 교실을 정치판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주장은 과도한 의심이라고 판단됐다. 양측의 취지와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충분히 조율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선관위는 6일 전체회의를 열어 시교육청이 주관해 교사가 개입하는 모의투표 교육을 원천적으로 불허했다. 고3 교실이 과도하게 정치화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시민교육을 강조하면서 정작 필요한 고3생들은 물론 투표권이 없는 학생들까지 모두 배제하는 것은 모순이다. 중앙선관위는 그동안 교내 모의투표 교육에 대한 3차례의 회신에서 “교육청이 직접 하지 않거나, 투표권이 없는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는 가능하다”고 해왔다. 이날 불허 조치는 그동안 견지해온 방침에도 어긋난다. 고3생들은 그냥 공부만 하다가 투표장으로 나가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호별 방문에 대한 해석도 이해하기 어렵다. 교실 한 곳에 이어 운동장에서 후보 지지 발언을 하면 호별 방문이 아니고, 연속으로 두 교실을 방문하면 호별 방문이라고 한 것은 누가 봐도 어색하다. 이런 식이라면 화장실이나 실험실을 찾아다니며 운동하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런 일들이 빚어진 것은 준비할 틈도 주지 않은 채 18세 투표권을 부여한 정치권 탓이 크다. 특히 자유한국당 등 보수파들은 투표연령 인하를 끝까지 반대만 해서 이를 논의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이제 와서 고3생들의 정치화가 우려된다며 시민교육 자체에 제동을 거는 것은 후안무치한 일이다. 일본은 정치권과 정부가 3년에 걸쳐 차근히 준비한 뒤 18세 선거권을 시행했다. 선관위는 지난달 국회에 18세 투표연령 인하에 따른 법률상의 허점들을 보완해달라고 요청했다. 학생들이 범법자가 되는 것을 막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정치권은 2월 국회에서 이 문제를 해소해주어야 한다.

선관위가 당초 서울시교육청의 교내 모의투표에 난색을 표한 이유는 실제 투표용지와 흡사한 모형을 사용해 법을 어길 것을 염려한 탓이다. 하지만 법에 저촉하지 않고 모의투표를 진행할 방법은 있다. 가상의 정당 이름을 쓰고, 정당이나 후보자 기호도 실제 선거에서 사용하는 1, 2, 3 대신 가, 나, 다를 쓰면 된다. 모의 투표 후 개표를 하지 않거나 그 결과를 선거 후 공개하는 방안도 있다. 서울시교육청이 모의투표에 대한 질의를 하기도 전에 중앙선관위가 불허 결정을 내린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자칫 선관위가 투표 관리만 염려해 18세 선거권의 취지를 훼손했다는 말을 듣지 않을까 우려된다. 선관위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젠 세계를 놀라게 한 우리 촛불시민들의 의식 수준과 역량을 믿어도 되지 않을까.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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