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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수의 자랑은 역시 산업화다. 좀 길게 잡으면 무능한 선조 이후 아무도 해내지 못했던 가난 구제, 그걸 해낸 세력이 5·16 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세력이다. 박정희 시대의 고도성장과 경제발전을 직접 체험한, 60세 이상의 어르신들이 갖는 ‘세대효과’는 클 수밖에 없다. 이 산업화가 사회적 바탕이라면 보수의 정치적 기둥은 반공·반북이다. 이 반공·반북 또한 한국전쟁을 통해 강한 세대효과를 낳고 있다.

산업화를 일궈냄으로써 얻은 정당성은 IMF 경제위기로 무너졌다. 반면에 반공·반북 이념은 햇볕정책으로 흔들리긴 했지만 굳건하게 보수 정체성의 벼리로 남아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 보수의 헤게모니는 안보보수가 잡고 있다. 그럼에도 워낙 낡은 보수라 이 틀을 깨는 혁신의 시도는 불가피한 과제였다. 보통사람들에게 먹고사는 현실이 워낙 고단하고 힘든 탓에 보수도 복지나 경제민주화를 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7년 대선에서 줄·푸·세를 표방했던 박근혜가 2012년 복지와 경제민주화로 터닝해야 할 정도로 서민의 삶은 피폐했다.

대한민국의 보수, 그것도 보수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에 의해 복지와 경제민주화가 수용됐으니 개혁적 보수의 등장이 임박한 것으로 보였다. 하나 박근혜 대통령이 원래의 낡은 보수로 회귀하면서 개혁적 보수는 수세에 처했고, 박 대통령의 거듭된 실정을 계기로 다시 전면에 나서는 기회를 잡았으나 얼마 뒤 ‘제거’됐다. 박 대통령이 개혁적 보수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찍어냄으로써 낡은 보수는 대세가 됐다. 이로써 보수는 스스로 진화할 동력을 잃어버렸다.



유 전 대표가 쫓겨날 때에는 그래도 내부 저항이 있었다. 의원들이 한동안 버텼다. 합리성과 민주주의를 지향하고자 하는 보수의 퍼덕임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역사교과서 국정화 국면에서는 그런 움직임조차도 아예 없다. 낯 뜨거운 충성경쟁만 난무하고 있다. 보기 민망할 정도의 굴종이고, 지질하기 짝이 없는 영합이다. 새누리당은 TPP(Two Park Party), 즉 박정희·박근혜의 정당이 됐다. 이처럼 영혼 없는 보수, 경제를 살린다며 부동산을 들쑤시고 부채 늘리고 노동을 옥죄는 ‘허튼짓’밖에 못하는 보수가 집권하니 헬조선이고 망한민국인 것이다.

지금, 보수가 지질하다면 진보는 얕다.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사업, 작년 4월16일에 벌어진 세월호 참사에 이어 국정화 문제에 대해서도 일차원적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4대강 사업 때문에 환경이 파괴되기도 했지만 민생이 거덜 났다. 그럼에도 4대강 사업을 민생이슈로 풀어내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도 규탄하며 다그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역사쿠데타다. 민주화를 일궈낸 세력으로서 이 문제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의지가 아니라 방법이다.

국정화 이슈를 통해 박근혜 정부의 본질, 즉 반민생과 반서민의 성격을 드러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민생쿠데타의 측면을 부각시켜야 한다. 지난 13일자 워싱턴포스트 신문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박근혜 대통령 앞에 놓인 가장 큰 도전은 경제다. 경제실정이 아킬레스건이라는 얘기다. 이걸 숨기기 위한 것이든, 평소의 소신 때문이든 결과적으로 이 이슈 때문에 민생파탄이 가려질 수 있다. 박근혜 정부의 실정이 아니라 박근혜 개인에 대한 찬반으로, 영남과 보수가 결집해 공고한 진영으로 움직이게 하는 프레임은 야권이나 진보에게 실익이 없다.

박 대통령의 다음 수순은 민생 살리기이다. 그러면서 야당의 반대를 정략으로 규정할 것이다. 이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고 부들부들 치를 떠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단호한 대응이 아니다. 시끄러운 소수가 아니라 분노하는 다수에게 눈높이 맞추고, 그들이 자신의 삶을 위해서 분기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올바른 대응이다. ‘나라 분열시키지 말고 민생 챙기고, 경제를 살리라’고 해야 한다. 그래야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여권의 덫이 될 수 있다.

박 대통령이 자신감을 갖는 원천은 투표율 높은 콘크리트 지지층이다. 30~40%, 즉 100명 중 30~40명의 지지는 소수지만 모집단이 60~70명으로 줄어들 때에는 다수다. 따라서 나머지 60~70%를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을 때 야당이 이길 수 있다. 식상한 대응으로는 이게 불가능하다. 야당이 총선에서 이기면 국정화를 저지할 수 있다. 지금 야당에 절실한 것은 투지와 더불어 바른 전략이다. 그래야 이긴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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