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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개헌론이 불거지고 있다. 한동안 금기어이던 개헌이 다시 정치 아젠다로 등장하는 것부터가 변화다. 작년 10월 김무성 대표는 2015년 초 개헌 논의의 봇물이 터질 것이라고 했다가 청와대의 반발에 직면해 자신의 불찰이라며 사죄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그즈음 국무회의를 통해 쐐기를 박았다. “개헌 논의 등 다른 곳으로 국가역량을 분산시킬 경우 또 다른 경제 블랙홀을 유발시킬 수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친박 실세들이 개헌론을 꺼내는 것은 그 자체로 생뚱맞고 낯부끄러운 표변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이슈에 대한 여론의 광범위한 반발을 덮기 위해 민생 프레임을 가동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터에 이 무슨 눈치 없는 헛발질인가.

모양이 우습기는 하지만 속셈이 없는 건 아니다. 어떤 의도일까? 정치에선 흔히 어떤 주장의 내용보다 화자에 주목할 때 그 진의를 더 쉽고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다. 개헌론과 관련해서도 누가 개헌 운운하고 있는지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하기 쉽다. 최근의 개헌론을 꺼낸 인물 중 주목할 만한 인물은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홍문종 새누리당 전 사무총장이다. 이들은 모두 자타가 공인하는 친박 실세들이고, 박근혜 대통령의 속내를 정확하게 읽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들이 개헌론을 봉인한 대통령의 지난 발언을 잊어버렸을 리 없다. 따라서 허튼소리로 치부할 게 아니다.

개헌론은 지금의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변수다. 대선주자들 간의 경쟁구도 역시 백지상태로 바뀐다. 특히 홍문종 전 총장의 발언대로, 이원집정부제로 간다면 김무성 대표의 선두 위상(front runner)은 모래 위의 성이다. 내치를 담당하는 총리가 국회에서 선출된다면 그건 유력한 대선주자가 없는 친박 그룹의 불임성을 해결할 수 있는 묘수다. 결국 친박 실세들이 개헌론을 꺼내는 이유는 이렇다 할 친박 대선주자가 없는 데서 비롯된 초조함의 발로다. 무릇 대선에 나설 인물이 여의치 않은 계파는 존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무성 대표와 원유철 원내대표가 G20에 참석하는 박근혜 대통령을 환송하고 있다._연합뉴스


구체적인 형태가 무엇이든 개헌의 골간은 대통령의 권력이 줄어드는 분권형이 될 수밖에 없다. 즉, 의회의 권력이 더 커지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선거의 차원으로 해석하면, 진보와 보수가 초박빙의 싸움을 펼치는 대선보다는 새누리당에 유리한 총선을 통해 국가권력의 향배와 몫을 정하자는 것이다. 사실 각종 선거 중에서 보수가 제일 두려워하는 선거가 대선이다. 대선에 너무 많은 ‘판돈’이 걸린 데다 승부도 예측불허이기 때문이다. 이 부담을 줄이는 건 보수의 오래된 열망이다.

대한민국의 보수는 내각제를 염원해왔다. 내각제를 통해 일본의 보수처럼 안정적인 장기집권의 기반을 만들고 싶어 한다. 3당 합당도 이 염원의 반영이었다. 하지만 여권이 주도했기에 권력연장의 음모로 비쳐져 계속 실패했다. 그런데 이번엔 야당이 먼저, 게다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실 국회의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개헌에 적극적이다. 대통령 권력을 줄이고 자신들의 권력을 늘리고 싶은 탓이다. 호조건은 또 있다. 강력한 대선주자가 없다. 개헌에 제동을 걸 이른바 거부권 행사자(veto player)가 없다는 얘기다.

현재 개헌의 걸림돌은 박 대통령의 반대다. 이는 곧 대통령이 동의하기만 하면 개헌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듯 관건은 박 대통령의 선택인데, 어떻게 할까? 총선이 끝나면 대통령도 OK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최근 박 대통령이 여권을 ‘박근혜 1인 체제’로 거칠게 재편하고, 물갈이에 나서는 걸 보면 그는 레임덕을 순리로 받아들이거나, 퇴임 후를 조용히 보낼 것 같지 않다. 끝까지 현실정치의 행위자로 운신하려는 ‘기운’마저 느껴진다. 이 때문에 그에게 개헌은 아주 강렬한 유혹이 될 수 있다.

행정부와 입법부 모두 보수가 장악한 상황 하에서 개헌은 야권과 진보에 불리하다. 개헌론이 내년 총선에서 보수를 대거 결집시킬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개헌으로 보수 우위를 제도화하려는 열망이 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 총선에서 친박이 다수를 이루고, 새누리당이 크게 승리할지 여부가 1차 관건이다. 따라서 2016년 총선은 한국정치의 지형을 바꿀, ‘워털루 전투’에 비견될 만한 중대 선거(critical election)가 될 것이다. 이 성패에 문재인 대표, 안철수 전 대표, 박원순 시장 등 대선주자들의 명운, 나아가 새정치민주연합과 진보의 미래까지 걸려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직 작은 다툼에 빠져 있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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