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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세월호특별법에 대한 여야 합의 내용을 유가족들이 수용하지 않으면,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한다. 또 이완구 원내대표는 “100% 유가족을 만족시킬 안은 없다”는 말도 했다. 교착상태에 빠진 세월호특별법을 빨리 처리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최대한 좋게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발언 하나로 새누리당이 어떤 관점에서 세월호특별법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지, 그 태도의 일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씁쓸하다.

왜 문제인가. 기본적으로 이 말이 진심이라면, 이 원내대표는 유가족들과 국민을 서로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것을 실토하는 셈이다. 유가족들이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유가족들은 국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이 내용만을 놓고 보면 유가족들은 확실히 새누리당이 상정하는 그 국민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 더해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는 수사에서 알 수 있듯이, 유가족들은 기본적으로 의회 바깥에 존재하는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집단처럼 비친다.

의회라는 곳은 민선 국회의원으로 채워진 입법기구이다. 국회의원이 민선인 까닭은 국민의 의사를 대의하기 위함이다. 의회의 권력은 이런 대의 기능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이 원내대표의 말처럼 의회가 모든 국민의 의사를 반영해서 입법을 추진할 수는 없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의회가 국민 하나하나를 대의할 수 없으니 국회의원들이 결정하는 것을 묵묵히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회의원들이 의회 바깥에서 들려오는 국민들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회 민주주의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허약한 의회 민주주의는 파시즘과 같은 정치적 재난을 초래한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정치적 극단주의가 기생할 수 있는 터전은 그 어디도 아닌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고장난 의회라고 많은 정치학자들이 경고해 왔다. 따라서 툭하면 한국이 의회 민주주의 덕분에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다고 자찬하면서, 그 민주주의의 원리·원칙을 지키는 일에 소홀한 것은 제 발등 찍는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요즘 새누리당의 구호가 “보수는 혁신합니다”이다. 보수와 혁신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가치를 서로 뒤섞는 효과를 통해 새누리당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진보에 고유했던 혁신이라는 이미지를 가져가서 보수를 버리고 진보가 되겠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새누리당이 말하는 혁신이란 결과적으로 중도층을 끌어안는 제대로 된 보수가 되겠다는 것일 테다. 그러나 세월호 유가족들을 자신들의 국민에 포함시키지 않는 한, 이런 시도는 성공한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언제든 자신들에게도 닥쳐올 수 있는 불가항력적인 재난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국민이 대다수인 상황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특정한 정치색을 들씌우는 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이 될 수도 있는 사안을 미리 발로 차서 내버리는 꼴이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유가족들이 24일 청와대 길목인 서울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는 비행기를 접어 현수막 아래 놓았다. 청와대는 특별법 제정은 국회 소관이라는 입장이다. (출처 : 경향DB)


새누리당이 합의를 했다는 새정치민주연합은 유가족들을 대표한다기보다 대리하고 있는 입장에 불과하다. 유가족들은 정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연히 새정치민주연합의 생각이 유가족들과 일치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새누리당은 새정치민주연합과 합의했다는 핑계로 유가족들을 향해 의회 민주주의에 도전한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새누리당에도 유가족들을 대리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국민을 대의하지 않는 의회에 무슨 존재 이유가 있을 수 있고, 어떤 민주주의가 국민보다 더 상위가치를 가질 수 있을지 궁금하다.

‘유민 아빠’ 김영오씨는 40일이 넘게 단식을 이어왔다. 숱한 음해가 있었지만, 유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철저한 진상규명이다. 수사권과 기소권 문제는 그 진상규명을 제대로 하기 위한 상징적인 요구사항이다. 그러나 여야 두 정당은 오직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정략적인 계산만을 고려해서 합의안을 도출했을 뿐이다.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국민의 열광을 생각해보자. 교황에게 기대했던 것은 상징적인 위안이었다. 의회가 해야 할 일을 교황이라는 상징적 존재가 대신했다. 진지하게 다시 유가족들의 마음을 살피는 의회 민주주의가 아쉽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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