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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에르 형제가 <기차의 도착>이라는 인류 최초의 영화를 상영했을 때 관객들은 진짜 기차가 도착하는 줄 알고 깜짝 놀라 일어나 도망치는 소동을 벌였다고 한다. 20세기 초반까지 미디어에 등장하는 사물이 사실이라는 믿음은 여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정반대이다. 미디어는 사물의 사실성을 흐리는 방해물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반전은 미디어 자체에 대한 불신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은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에 가깝다. 미디어가 단순히 사물에 대한 정보만을 전해주는 수동적인 중간자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오래전에 설득력을 상실했다. 오히려 미디어가 적극적으로 사물에 대한 ‘진실’을 창조하고 날조하기도 한다는 사실에 대한 꾸준한 증거가 있다. 가장 분명한 증거가 바로 정치일 것이다. 미디어가 매스미디어의 준말이고 대중의 욕망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짐작 가능하듯이, 시장주의 경제와 쌍을 이루는 대의 민주주의 정치는 미디어의 활용 없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미디어는 중간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의견들을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대의’하는 자리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 상황을 보면서 미디어의 속성에 관한 이런 생각을 나만 하는 것은 아닐 테다. 참사의 ‘진실’에 대한 국민의 알 권리를 주장하면서 참사 현장을 ‘실시간’으로 중계했던 그 미디어는 현장의 정보를 전하면서 동시에 은폐했다. 이런 역설은 비난의 화살을 도맡아 받는 일부 ‘기레기(기자+쓰레기)’ 탓만은 아니다. 미디어의 포화상태로 인해 빚어진 사실성의 충돌이 가감없이 그대로 쏟아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증명 불가능한 이른바 ‘팩트’는 SNS를 떠도는 음모론 이상을 넘지 못한다. ‘팩트’는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 누군가 정리해주지 않는 한 ‘팩트’는 서로 모순을 일으키며 중구난방으로 떠들 뿐이다. 이 현상을 ‘팩트’의 민주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TV 뉴스 속보 보는 실종자 가족 (출처 : 경향DB)

민주주의는 합의를 이루기 위한 소음의 소용돌이다. 하나를 맞추면 하나가 맞지 않는 잘못된 퍼즐이 바로 ‘팩트’이다. 이런 까닭에 사실의 문제는 이제 무엇에서 누구로 옮겨간 것처럼 보인다.

미디어의 신뢰가 합의를 이끌어내는 기능에 있다면, 이 신뢰의 문제도 개인의 명망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손석희 뉴스’에 대한 찬사는 이런 변화를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종 18일 만에 발견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사체 발견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팩트’의 민주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 미디어에 넘쳐나는 반론의 근거로 인해 경찰의 발표는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다. 미디어는 가만 있지 않는다. 대중의 사유 자체가 미디어를 형성한다. 한국에서 미디어는 거대한 클라우드소싱의 상호작용이기도 하다.

이 상황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든, 근본 원인은 미디어의 ‘민주화’이다. 이 ‘민주화’는 합리적 판단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 이명박 정부가 밀어붙인 종편정책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시장의 포화상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또 다른 시장주의라는 역설이 만들어놓은 기묘한 현실을 지금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미디어의 범람이 모든 사실을 공정하게 대접하진 않는다.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넘쳐나는 미디어는 미디어 안과 밖을 균질하게 만들어내고 있다. 사실과 가치가 전도되면서 특정 사실에 대한 가치평가가 마치 사실성인 양 행세를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가치는 사실과 달라서 서로 겹쳐놓아도 전혀 문제 없다. 오히려 다양성을 자랑할 수 있다. 구조적 문제로 인해 발생한 세월호 참사 같은 근본적 사건도 예외가 아니다. ‘순수 유가족’ 논란은 정확하게 이런 문제점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정부와 여당이 보여주는 ‘이상한’ 태도는 사실보다도 가치에 더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모두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이지 배상책임이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 세월호 참사는 ‘교통사고’일 수 있겠지만, 어두운 바다로 가라앉은 진실은 전혀 다른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미디어가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없다면 정부라도 진실의 편에 서기 위해 노력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지금까지 진실규명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정부와 여당은 불신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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