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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의 화제였던 MBC 드라마 <왔다! 장보리>가 막을 내렸다. 최종회의 시청률이 40%에 달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물론 이런 시청률이 특별하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드라마의 내용이 특출했다고 평가하기도 망설여진다. 그렇지만 여하튼 <왔다! 장보리>는 시청자의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이 드라마의 정체성은 연역적인 방식으로 구성된다.

텔 레비전 드라마는 대중의 욕망을 드러내는 대중문화의 거울이다. 네덜란드 여성학자 이엔 앙은 <댈러스 보기>라는 저작을 통해 왜 네덜란드 여성들이 자신들의 처지와 동떨어진 통속적인 미국 부자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는지, 이유를 분석했다. 원인은 부자보다도 여성이라는 성차에 있었다. 네덜란드 여성들은 미국 부자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낀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드러난 미국 여성들의 처지에 공명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자의 이야기라고 해도 슬픔과 고통을 짊어진 당사자는 여성들이었고, 이런 여성 캐릭터에 여성 시청자들은 유대감을 발휘했다.

비 현실적인 ‘막장드라마’에 많은 시청자들이 호응하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왔다! 장보리>도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한 요소, 다시 말해서, 출생의 비밀과 뒤바뀐 운명, 그리고 개연성 없는 플롯 전개로 인한 파격성이라는 전형적인 ‘막장드라마’의 문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특히 관심의 초점을 받았던 ‘연민정’이라는 캐릭터는 그 이름에서 연상되듯이, 시청자들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대상 자체였다.

막 장드라마로 손쉽게 명명되었지만, 이 지점에서 <왔다! 장보리>는 한 편의 우화극으로 탈바꿈한다. 각각의 캐릭터는 입체적이라기보다 평면적으로 규범적인 가치를 대리한다. 너무 착한 장보리와 너무 악한 연민정이라는 이분법이 드라마를 밀고 가는 주요 갈등이었다. 그러나 이 갈등은 이상한 결과를 낳았다. 운명의 피해자인 장보리라는 캐릭터에 대해 시청자들은 피로감을 느꼈던 것이다. 시청자들이 긍정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부정적인 캐릭터에 더 마음을 쏟았던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절대적 악이 등장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용서와 화해로 공동체의 완성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왔다! 장보리>도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법칙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출세를 위해 온갖 범죄에 가담하는 캐릭터에 시청자들이 ‘연민’의 시선을 보냈다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앙의 주장을 차용한다면, 연민정에 대한 시청자들의 공감은 ‘정서적 리얼리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을 이해하기는 하되, 그 방식이 공감의 정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청자들은 왜 장보리보다도 연민정에게 더 정서적 친화성을 드러낸 것일까. 드 라마에서 출세를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연민정의 모습과 오직 개인의 능력 이외에 기댈 곳이 없는 자신의 모습이 오롯이 겹쳐 보였던 것은 아닐까. 텔레비전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상과 텔레비전 밖에서 자신이 겪는 현실 모두 극단적이라는 점에서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시청자들이 느꼈던 것은 아닐까.


보 통 대중문화에 대한 욕망은 솔직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막장드라마를 즐기면서도 우리는 종종 “내가 이런 드라마를 좋아하진 않지만, 심심풀이로 본다”고 말하곤 한다. “미신을 믿진 않지만, 재미있어서 본다”면서 타로 점을 보러 가는 심리랑 같다. 막장드라마 논란이 끊이지 않으면서도 계속 시청률이 몰리는 까닭은 이런 심리작용 덕분일 것이다. 그 러나 막장드라마나 타로 점이 심심풀이나 재미에 그치지 않고 현실의 일부로 바뀐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직장을 잃은 이에게 로또 당첨만이 유일한 해결책일 수밖에 없다면, 더 이상 로또는 심심풀이나 재미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 금까지 연민정과 같은 캐릭터는 현실에서 배제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무엇인가를 배제시키려면, 그것과 자신이 확연히 다른 세계에 속해야 한다. 그러나 더 이상 그 분리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모두가 몰락하고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강정과 밀양과 후쿠시마를 다른 세계로 만들기는 쉬웠다. 그러나 세월호는 그 세계가 우리 모두의 세계였다는 것을 깨우쳐줬다. 이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가에 대한 요청을 국가의 재구성으로 바꾸지 않는 한, 이 불편한 진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되고 있을 뿐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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