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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안철수의 생각>이 초당 몇 권씩 팔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막상 눈앞에서 이 사실을 목도하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을 준다. ‘어떤 열망’을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느낌은 단순한 인상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 같다. 감히 단언하건대, 이 ‘어떤 열망’은 기성정치로 불리는 정당정치와 정치인 집단에 대한 혐오를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안철수 현상’을 보고 부러워하거나 개탄할 것이 아니라, 매진 사례를 속출시키고 있는 이 열망에서 고민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정당정치에 대한 혐오와 그 바깥의 정치에 대한 희망이 안철수라는 하나의 기표로 집중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경향신문DB)
이 상황은 19대 총선에서 나타난 진보정당에 대한 미약한 지지율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부르주아 정치의 위기를 해소할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 진보의 이념으로 수렴하지 않고 안철수라는 개인으로 집중되고 있는 것은 여러 모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정당보다도 인물에 대한 지지는 한국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정치의 장면이다. 19대 총선에서 그나마 선전했던 통합진보당의 경우도 노회찬과 심상정, 그리고 이정희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그만한 결과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가 목도한 통합진보당 사태는 이런 현실을 외면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당보다도 ‘인물’이 중요했던 것인데, 이른바 당내 일부 세력이 ‘조직’으로 그 성과를 받으려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한국 정당정치가 처해 있는 이런 문제를 두고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논하는 목소리들도 있지만, 현실은 현실이고, 이를 인정하는 조건에서 전망은 현실 변화를 위한 실천지침과 결합할 필요가 있다. 장기 전망이 이념의 문제라면, 단기 해결책은 이념과 무관한 실용의 문제이다.
한국 정당정치가 위기에 빠진 것은 적절하게 ‘시민’의 이해관계를 재현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무능한 정치인 탓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혼자서 해결하기 버거운 제도적인 문제가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선거법을 비롯해서 소선거구제에 이르기까지 특정 정당이 유연하게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안철수 현상’은 이런 정당정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정당이 재현의 기능을 적절히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현시했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 정당 지지율이 별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통계가 이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물론 ‘안철수 현상’을 과거 문국현의 경우에 빗대 중요하지 않게 취급하는 관점도 없지 않다. 참신한 인물만으로는 현실 정치에서 지지를 획득하기가 쉽지 않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 논리가 일정하게 타당성을 갖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참신한 인물이 반드시 기성 정당의 조직을 등에 업어야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명제가 자동적으로 참인 것은 아니다.
안철수 원장을 ‘운 좋은 인물’로 한정해놓고 싶어 하는 입장이 놓치고 있는 것은, 이처럼 정당에 대한 지지와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가 연관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은 정당정치를 교정하고 보완하는 기능을 한다. 국회를 정치인의 이익집단으로, 대통령을 국민의 대변자로 바라보는 전도현상이 분명히 있다. 따라서 안철수가 반드시 민주통합당의 노선과 결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필요한 것은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상징적으로 담당하고 있는 대립전선이다.
과거에 이 대립전선은 군사독재에 협력하는 반민주세력과 그에 저항하는 민주세력으로 구분하면 간편했다. 말하자면, 이념에 따른 대립전선이 선명하게 그어질 수 있었던 셈이다. 이런 구분이 지금까지 존속해온 여야 정당의 정체성이었다. 그러나 이 정체성의 구도는 실질적인 대립전선의 변동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정책을 대거 수정한 것도 이런 변동을 따라잡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박근혜 후보의 ‘5·16 쿠데타 발언’에서 그 한계는 명백하다.
정당정치가 구조적인 문제에 부딪혀 좌초해 있는 상황에서 안철수라는 개인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정치개혁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이 요구를 등에 업고 지금, 안 원장은 정치적 대립전선을 ‘상식 대 비상식’이라는 2002년의 구도로 돌려놓고 있다. 게다가 안 원장은 ‘책 출간’이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시민’을 직접적으로 계몽하고자 한다. 과거 문국현의 경우와 다른 모습이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2002년 노무현 바람과 마찬가지로 ‘안철수 현상’은 선거를 정치개혁 운동으로 바꿀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개혁의 내용이 무엇인지 판단을 유보한다면, 이 자체는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안 원장에게 집중하기보다 큰 그림을 보면서 낡은 구도에 매여 있던 정치를 새로운 이념의 지형으로 옮겨놓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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