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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왜 ‘색깔 논쟁’은 돌아온 것인가? 오래전 파묻어 버렸다고 생각했던 좀비가 귀환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 좀비의 귀환은 ‘여의도 극장’에서 상영되는 철 지난 영화일 뿐이다.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촉발된 ‘색깔 논쟁’은 겉으로 심각하게 보이지만, 조금만 속내를 들춰보면 불편한 진실을 감추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색깔 논쟁’은 정당정치의 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불려나온 오래된 마법의 주문이다. 냉전 이데올로기는 한국 자본주의의 형성과 관련해서 ‘국민’을 관리하기 위한 장치였다. 



(경향신문DB)


 박정희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자본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정치를 추방하도록 만든 것이 냉전 이데올로기였다. 북한이 엄연히 존재하는 실체적 위협이었기 때문에 이런 의도는 훌륭하게 작동할 수 있었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의 체제 유지를 위해 북한은 주권 없는 미국의 식민지로 남한을 규정했던 것이다. 


한국의 정당정치는 북한이라는 금기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런 까닭에 박정희체제의 붕괴가 곧바로 민간정부의 출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전두환-노태우 체제라는 과도기를 거쳐야 했다. 민주화세력에게도 북한은 억압의 대상이었다. 공론의 장에서 북한은 철저하게 ‘없는 것’으로 간주됐고, 민주주의를 저지하기 위한 훌륭한 부적 노릇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노태우 체제는 박정희 체제와 달리 시장자유주의를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도시는 급속하게 팽창했고, 시장은 상품으로 넘쳐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소비사회로 급변했고, 물질적 풍요를 경험하면서 성장한 세대는 생산자라기보다 소비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 모든 과정이 한국에서 ‘민주화’로 통칭되었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흐르는 자본주의’가 완성된 것이었다. 어떤 삶도 이제 고정되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런 상황을 자초한 우파들 역시 불안한 현실을 견뎌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변화는 우파들에게 결코 유리한 조건이 아니다. 그래서 우파들은 보수주의를 채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보수주의가 한시바삐 과거와 결별해야 하는 ‘흐르는 자본주의’의 혁신성과 공생할 수는 없는 일이다. 스티브 잡스가 보여준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이다. 


그는 ‘흐르는 자본주의’를 거슬러, 고전적 부르주아의 공식을 경영철학에 도입했다. 고전적 부르주아는 창조적 개인이라는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 이념의 복원이 애플 신화의 핵심이었다. 이런 애플의 성공을 본받아서 요즘 한국 사회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인문경영’이라는 수사학도 모든 이념을 해체시키는 자본의 현실에 대한 보수주의의 대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발전은 보수주의 자체의 위기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자본주의의 시장은 모든 것을 교환할 수 있는 장소이다. 따라서 이 장소에서 교환할 수 없는 이념은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당할 뿐이다. 탈이념이 보수의 논리로 작동하는 현상은 비단 한국에 국한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영국의 대처리즘은 혁신이나 변화라는 진보의 개념을 보수의 것으로 전유한 대표적인 이념이었다. 혁신과 변화를 이야기하는 보수라는 모순은 그만큼 보수주의 자체의 위기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19대 총선을 거치면서 한국의 우파들은 전도현상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보수의 대표주자인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개명한 것도 모자라 복지와 경제민주화라는 진보의 의제를 보수의 것으로 전유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민주당은 제몫 챙기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면서 오히려 보수보다 더 보수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 한마디로 우파들이 헷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갑자기 자신들이 그토록 혐오하던 반대편의 자리에 가 있었다고 할까?


이런 결과에 따른 직접적 피해자는 바로 우파 이데올로그들이다. 정치인들이야 어차피 집권이 목적이니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면 무엇이든 가져다 쓸 수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파 이데올로그들은 과거 자신들을 먹여살렸던 그 이념의 유효성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때맞춰 통합진보당 사태와 임수경 의원 말실수가 일어났고, 이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왔다. ‘색깔 논쟁’을 통해 새누리당은 다시 보수처럼 보이고 민주당은 다시 진보처럼 보이게 되었다. 이것이 이렇게 철 지난 ‘색깔 논쟁’이 정치인들과 이데올로그들에게 필요했던 이유다. 


과연 이 대립구도는 오래갈 수 있을까? ‘색깔 논쟁’ 따위로 연명하려는 꼼수가 ‘흐르는 자본주의’에서 통할 리가 없다. 소비주의가 삶의 중심에 놓여 있는 ‘새로운 한국’에서 교환되지 않는 이념은 아무런 가치를 만들어낼 수가 없다. ‘새마을운동’이니 ‘뉴타운’이니 한국 우파들만큼 새것을 위해 낡은 것을 배척한 경우도 없을 것이다. 새로운 문물의 상징인 에펠탑이 꼴 보기 싫어서 그 밑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는 모파상의 패기를 한국 우파들에게 기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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