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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어떤 자양강장제 광고에 나오는 장면. 포장마차에서 직장인 둘이 소주를 마신다. 사표를 내겠다고 한 남자가 큰소리를 치고 친구가 그를 말린다. 갑자기 이 장면은 텔레비전 속에 담기고 이를 지켜보던 취업준비생은 “취직을 해야 사표를 쓰지”라며 부러워한다. 역지사지해보면 우리 모두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교훈을 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간접적으로 증언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드디어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출마선언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1970년대 경제 발전의 장소 중 하나였던 타임스퀘어에서 출마선언을 하면서 박 전 위원장이 내건 구호는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였다. 굳이 1970년대를 상징하는 장소에서 출마선언을 한 박 전 위원장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말하는 ‘꿈’이 사실은 ‘나의 행복’을 이루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 꿈은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197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나의 행복’을 실현하겠다는 노력이 국가를 발전시키고, 또한 국가의 발전이 다시 ‘나의 행복’으로 순환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경향신문DB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박 전 위원장의 출마선언문에 유독 가족에 대한 언급이 많다는 사실이다. 비극적이었던 자신의 가족사뿐만 아니라, 1997년 IMF 구제금융 시기를 언급하면서 고통받는 ‘국민들’을 보고 안타까워서 정치를 시작했다고 강조하는 대목이 그렇다. 알다시피, 1997년 경제위기를 상징하는 것은 바로 가족의 해체이다. 숱한 가장들이 가출하고, 가정이 산산이 부서진 경험을 ‘국민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출마선언의 내용이 표상하고 있는 것이 ‘가족의 안전’이라는 사실은 곱씹어 봐야 하는 문제인 것 같다. 이 문제에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는 이들이 누구인지 물어본다면 상황은 명확해진다. 말할 것도 없이 ‘단란한 가정’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중산층’일 것이다. 설령 경제적인 처지에서 ‘중산층’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에 준하는 가치를 지향하는 이들 모두가 여기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박 전 위원장의 출마선언이 노리고 있는 대상은 바로 이렇게 ‘중산층 의식’을 가진 이들, 정확히 말해서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처지가 ‘중간쯤’ 간다고 생각하는 유권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박 전 위원장이 그려내는 한국 사회는 앞서 언급한 광고에 나오는 ‘사는 것은 모두 힘들다’는, 이른바 피로사회의 윤리를 체득하고 있는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취업자와 실업자는 결코 불평등하지 않다. 계급 따위가 이 완벽한 윤리의 공동체에 발붙일 수는 없다. 또 자양강장제만 있으면 피로가 풀리듯이 모든 문제가 풀릴 수 있는 세계이다.
그러나 이런 세계는 ‘꿈’에나 존재할 뿐, 실현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국가의 꿈’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꿈’으로 중심 이동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꿈’을 실현해야 하는 책임이 ‘국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있다는 의미로 말이다.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충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박 전 위원장이 암시하는 그 세계는 ‘중산층 의식’이 만들어낸 상상의 장소이다. 이 장소에서 비정규직이나 실업자, 또는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영세 자영업자는 시민권을 획득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박 전 위원장의 반대편에 있는 이들은 이런 사정을 자세하게 헤아리고 있을까? 화제가 되고 있는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의 예를 들어보자. 출마선언 당시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정책 슬로건을 내놓아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이 슬로건은 자매품이라고 할 ‘맘(mom) 편한 세상’이라는 슬로건과 같이 놓고 보면 그 의도가 분명해진다. 저녁에 가장이 일찍 귀가해서 단란한 시간을 나누는 ‘행복한 중산층 가정’의 풍경을 이 슬로건은 전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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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한 광고가 잘 보여주듯이 ‘저녁 있는 삶’을 바라는 직장인들도 있겠지만, ‘저녁 없는 삶’을 한 번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실업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 슬로건 역시 계급에서 유래하는 ‘격차사회’가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문학적인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 이외에 손 고문의 슬로건에서 박 전 위원장과 뚜렷한 차별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우리 삶에 대한 대책으로 ‘단란한 가정’이라는 좋았던 시절을 회고적으로 불러들인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렇다. 당연히 앞으로 다가올 현실에 대한 적절한 전망은 없다.
물론 이런 유사성은 정책에서도 드러난다. 둘 다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충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당연히 차별성을 부각하기 어렵다. 정책과 슬로건에서 여야가 비슷해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만큼 정당정치가 이념에 따라 선명하게 편가르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승패는 정책 실현의 능력을 어떻게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신선한 방식으로 증명하는가 여부에 달렸다. 정치가 점점 더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바뀌어가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제 정치는 기존 질서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로 변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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