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방한한 슬로베니아 철학자 지젝과 함께 비무장지대(DMZ)를 갔다. 그곳에서 그가 보고자 했던 것은 분단 상황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의 현장이었다. 평소 주장해온 역설의 장면들을 발견할 때마다 그는 흥미로워했다. 한국에서 북한이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보기 위해 그는 기념품점에서 북한 상품을 찾았다. 기념품점에 진열되어 있는 북한 상품은 주로 술이었는데, 그 중에 약간 포장이 다른 것이 있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경향신문DB)
눈썰미가 보통 아닌 지젝은 바로 그 술의 정체를 물었다. 안내문을 자세히 읽어보니, 탈북자들이 제조한 술이었다. 지젝은 파안대소하면서 “변절자들이 만든 술이군”하고 농담을 했다. 순간 얼마 전에 논란이 되었던 임수경 의원의 발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산 경험이 있는 지젝이 ‘변절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패러디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이기에 농담 삼아 당시에 횡행했던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지젝이 한국인이었다면, 임수경 의원 해프닝이 잘 말해주듯 ‘변절자’라는 용어를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을 테다. 탈북자를 ‘변절자’라고 부르는 순간, 사상에 대한 의심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벼운 농담이 통하지 않는 심각한 상황이 가로놓여 있는 셈이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현실 공산주의에서 태어나서 자란 지젝에게 이미 철지난 의미를 가진 ‘변절자’라는 말이 왜 자유민주주의를 체제이념으로 삼는다는 한국에서 문제가 되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 발언으로 탈북자들이 모욕감을 느꼈다면, 당사자들끼리 사과하고 지나가면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상황은 종북 논쟁으로 비화되어 급기야 공당의 원내대표라는 분이 종북주의자 명단을 거론하며 전형적인 매카시즘의 행태를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젝에게 농담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 과거의 이데올로기가 한국에서 여전히 맹렬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도 전체주의가 아닌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특정 세력들을 ‘제거’하는 것을 정의의 기준으로 설정하는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합리적인 논리로 설명하기 곤란하다.
지젝이 ‘변절자’라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는 조건 덕분이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가장 열심히 주장한 이들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자들이었는데, 결과적으로 탈이데올로기의 상황이 초래한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곤경이었다.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우파들에게 그 무엇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혼란은 기대하지 않았던 ‘고양이의 선물’이었다. 이런 까닭에 현실 공산주의권의 붕괴를 자유민주주의의 완성으로 간주하고 역사는 끝났다고 선언했던 미국의 정치학자 후쿠야마가 더 이상 자신을 후쿠야마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데올로기 없는 세상은 우파들에게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지난 대선에서 ‘잃어버린 10년’을 회복하자고 이명박 정부를 선택했던 한국의 우파들은 지난 4년간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자신들의 무능력을 입증할 수밖에 없었다. 천안함 사태는 그렇다 치더라도, 연평도 포격이라는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한국의 우파들은 독자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세계 이목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복수혈전을 펼쳤던 과거 이스라엘 우파들과 비교되는 실력인 셈이다. 걸핏하면 북한 공산당을 때려잡자고 외치던 한국의 우파들이지 않은가? 그런데 정작 기회가 왔을 때 이들은 아무것도 때려잡지 못했다.
통합진보당 사태와 임수경 의원 발언으로 불거진 종북 논쟁은 이런 우파들의 무능력을 만회하기 위한 회심의 반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이라는 ‘실질적 공포’를 회피하기 위해 촉발시킨 우파들의 반공 ‘코스프레’에 지나지 않는다. ‘실질적 공포’와 대면하기에 한국의 우파들은 너무 지켜야 할 것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종북 논쟁은 결코 북한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북한이라는 ‘절대 악’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효과적으로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이 상황에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탈이데올로기의 시대에 다시 이데올로기의 숭고를 불러들이려는 푸닥거리가 바로 종북 논쟁이라고 하겠다.
방한한 지젝이 보고 싶어 했던 것도 이런 역설 아니었을까? 다른 곳에서는 화석이 되어버린 이데올로기가 살아 숨쉬는 모습이 이방인의 눈에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물론 DMZ가 외국인에게 훌륭한 관광지가 된 것은 오래전 일이다. 지젝이 특별해서 한국의 분단현실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말로는 분단을 극복하자면서, 실제로 그 분단을 이용하고 있는 세력이 이런 상황을 지속시키고 있다. 이 세력이 남아 있는 한, 앞으로도 지젝 같은 이들이 한국에 오면 으레 DMZ에 가고 싶어 할 것이다.
'=====지난 칼럼===== > 이택광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택광의 왜?]안철수에 대한 열망과 정당정치 (0) | 2012.07.26 |
---|---|
[이택광의 왜?]‘단란한 가정’ 공약 (0) | 2012.07.12 |
[이택광의 왜?]철 지난 ‘색깔 논쟁’의 귀환 (0) | 2012.06.14 |
[이택광의 왜?]“고객님, 신제품 할인행사가 있으세요” (0) | 2012.05.31 |
[이택광의 왜?]당원 만의, 당원 만을 위한 정당 (0) | 2012.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