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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익명의 시간

opinionX 2020. 1. 2. 14:14

연말 송년회 시즌을 앞두고 이런저런 단기아르바이트를 했다. 남는 시간을 활용해서 술값이라도 좀 벌어볼 요량이었다. 상하차나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는 배제했다. 술값 벌려다가 병원비가 더 들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 걸 빼도 과연 현대사회, 별의별 아르바이트가 다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사용될 목소리 녹음이었다. 그럴싸하지 않은가. 인공지능에 관련된 일이라니. 돈도 벌고 미래도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아르바이트에 지원했다. 다음날 아침, 지정된 장소로 향했다. 합정동에 있는 오래된 오피스텔의 오래된 방이었다. 오래된 노트북 한 대와 오래된 마이크가 장비의 전부였다. 혼자 기다리던 남자는 말없이 노트북 화면을 켜고 지정된 단어들을 낭독하라고 했다. 약 20분에 걸쳐 몇백개의 단어를 읽었다. ‘교차로’ ‘부장님’ 같은 의미 있는 단어들과 ‘빽봉’ ‘로나가’ 같은 의미 없는 단어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아무 감정도 싣지 않고 단어들을 읽었다. 아무 대화도 하지 않고 목소리를 녹음했다. 낭독이 끝난 후 남자는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급여 지급을 위한 정보를 기입하는 종이였다. 낡은 방에 들어가서 낡은 방을 나올 때까지, 나와 남자가 나눈 대화는 “안녕하세요”와 “수고하셨습니다”가 전부였다. 인공지능처럼 그럴싸한 아르바이트가 아니었다. 기계처럼 차가운 시간이었다. 20분이 꽤 길었다.

얼마 후에는 모델 아르바이트를 했다. 모델, 이 얼마나 화려한 단어인가. 하지만 모델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얼굴과 몸을 가진 내가 화려한 모델일을 했을 리는 없다. 집 근처 입시 미술학원에서 뽑는 아르바이트였다. 오후 1시에 학원에 갔다. 사방에 진흙이 잔뜩 묻은 남루한 화실에 학생 10명이 있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무표정하게 앉았다. 5분에 한번씩 울림에 맞춰 조금씩 방향을 돌렸다. 열명 모두에게 나의 두상을 360도로 보여주면 50분이 지난다. 10분간 휴식 후 다시 의자에 앉아 똑같은 일(이걸 ‘일’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을 4시간 동안 반복했다. 평소의 4시간이라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음반 대여섯장을 들을 수 있고 영화를 두 편 가까이 볼 수 있다. 낮잠을 두세번은 잘 수 있고 낮술을 거나해질 때까지 마실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4시간은 나일강만큼 길었다. 아니, 알람이 울리는 5분도 한강처럼 길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생각뿐. 생각을 하고, 생각을 하고, 생각을 했다.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계획하는 거창한 시간을 가졌다. 생각의 항해에 필요한 연료가 동났다. 무의식의 파도에 사고를 맡기고 온갖 잡생각을 두서없이 하고 또 했다. 과정도, 결론도, 의미도 없는 생각(이걸 ‘생각’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을 4시간 동안 반복했다. 그사이 열 개의 흙덩어리는 열 개의 나를 닮은 사내의 흉상이 됐다. 어느새 나타난 강사가 그 흉상들을 품평하며 한 시간을 보냈다. 앞서의 네 시간에 비하면 쏜살같이 한 시간이 지나갔다. 리뷰가 끝난 후, 흉상 하나하나는 순식간에 다시 흙덩어리로 돌아갔다. 태어나서 처음 나의 흉상이 탄생했지만 그건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마치 화분이나 감귤과 같은 정물에 불과한 물체였다. 녹음 아르바이트와 모델 아르바이트를 할 때 글을 쓰고 방송을 통해 말과 얼굴을 제공하는 나는, 거기에 없었다. 사회적 존재를 거세당한 한 개인이 정해진 시간을 채웠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 것이다.

김창완밴드의 ‘시간’이라는 노래가 있다. 김창완이 2016년에 발표한, 현재로서는 그의 가장 최근곡이다. 1977년부터 그가 낸 노래 중 가장 쓸쓸하고 처량한 곡이기도 하다. 어쿠스틱 기타와 반도네온이 악기의 전부인 이 노래에서 그는 이런 가사를 부른다. “그냥 날 기억해줘 내 모습 그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꾸미고 싶지 않아 시간이 만든 대로 있던 모습 그대로.” 익명의 목소리와 익명의 존재로 이틀을 보내며 문득 이 노래가 떠올랐다. 새해가 왔다. 익명의 삶을 꾸려나갈 많은 사람들과 ‘시간’을 다시 듣고 싶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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