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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지난 21일 저녁 예멘에서 신문기자로 일했던 난민 하니와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허리를 다쳐 똑바로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인터뷰가 이어지는 동안 어둠을 푸르스름하게 밝히던 제주 초여름의 해도 저버렸다. 바깥에 있던 다른 난민들이 하나 둘씩 방으로 들어와 대화에 동참했다. 통역을 담당한 예멘인까지 포함하면 모두 6명의 ‘젊은 아랍 남성’들이 방 안에 함께 있었다. 여성은 내가 유일했다.

순간 나는 위축됐던 것 같다.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낯선 이방인 남성들이 다수가 되자 실제 이들이 내게 위협적인지 여부와 관계 없이 마음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이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예멘에 두고 온 가족, 전쟁이 벌어지기 전의 온전했던 삶에 대한 그리움, 예멘 땅에 가득한 죽음과 비참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들은 전쟁으로부터 도망쳐 나왔지만, 불안한 현재와 기약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싸우고 있었다. “무슬림은 평화를 뜻한다”고 힘주어 말하던 이들은 누구보다 예멘 난민의 일탈적 행동이 가져올 수 있는 난민 반대 여론의 증폭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지난달 21일 예멘 청소년 난민 하산(가명)이 여권으로 얼굴을 가린 채 촬영에 응했다. 정지윤 기자

내가 느꼈던 공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성으로 살면서 몸과 마음에 각인된 공포다. 하지만 그 순간 느꼈던 공포의 실체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내가 느꼈던 ‘막연한 공포’와 내 앞에 앉아있는 예멘 난민들을 동일시하는 것은 곤란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한 절박한 도움을 요청하는 자들이었고, 두려움은 내가 아니라 이들의 몫이었다. 이들은 이땅에서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약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주는 고립된 난민의 섬이 됐다. 법무부는 제주도에 들어오는 예멘 난민이 급증하자 이들의 무사증 입국을 금지하고 체류지역을 제주도로 제한했다. 출도제한 조치는 예멘 난민 문제를 우리로부터 더욱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팽배한 난민혐오 여론 속에서 제주도는 난민 문제를 풀기 위한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난민들을 흡수할 수 있는 아랍 커뮤니티나 산업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제주도는 난민수용 능력에 한계를 보이고 있지만 법무부는 “무사증 제도는 관광객을 유치해서 제주도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출도제한 조치는 당연하다”고 선을 그었다.

일자리를 구했지만 힘든 일에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난민이 급증하면서 지낼 곳이 없는 난민들의 숙소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 어렵게 이방인에게 대문을 열고 머물 곳을 내어주던 주민들도 외부에 이 사실이 알려지고 반대 여론이 증가하자 이들을 도와주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난민에 과도한 혐오와 지나친 온정주의는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정부가 손 놓고 있는 상황에서 개개인의 선의에 의해 어렵게 난민들에 대한 원조가 이뤄지고 있는데도 ‘지나친 온정주의’를 경계하는 것은 난민 혐오를 부추길 수 있다는 측면에서 부적절했다.

3년 전, 시리아의 세살배기 난민 쿠르디가 차가운 시신으로 터키 해안가에 떠올랐을 때, 우리는 연민과 애도에 인색하지 않았다. 난민 수용에 소극적인 서방국가들을 비판하며 난민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이 머나먼 이국의 해변이 아닌, 제주도에 들어오자 태도가 달라졌다. 배타와 혐오의 정서가 팽배하다.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은 “외국인이라고 무조건 불온하게 여기는 것은 혐오이고 인종주의”라며 “인종주의에 기반한 차별과 혐오는 외국인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 안의 약자와 소수자에게로 확산되기 때문에 허용돼선 안된다”고 말했다. 머나먼 나라 해변에서 숨진 쿠르디에게 연민과 온정을 느낄 수 있다면, 제주도에 당도한 500명의 예멘 난민들에게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나아가 난민을 수용하고 보호하는 것은 온정주의가 아니라 국제사회 일원으로서의 약속이고 의무다.

한 외국인 원어민 강사의 도움으로 지난달까지 주택에 머물던 하니와 동료들은 더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어 지금은 긴급구호숙소로 향했다. 그들이 언제까지 그곳에 머물 수 있을지, 제주에 머물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 답은 좁게는 제주도의 6명의 난민심사관의 손에 달려있고, 넓게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달려있다.

<이영경 토요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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