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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골이었다. 92년생 손흥민의 왼발 끝을 떠난 볼이 그림처럼 휘어지며 오른쪽 골네트에 꽂히자 93분간 답답해하며 맥주만 들이켜던 아저씨들은 “골~”을 외치며 벌떡 일어섰다. 반가움도 잠시, 두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숨을 헐떡이는 손흥민의 모습을 보니 애잔해졌다. 손흥민은 이제 스물여섯의 청년이다.

기억 속의 첫 월드컵은 초등학생 때인 1985년 11월 한국과 일본의 월드컵 아시아 예선 최종전이다. 골이 들어가자 최순호 선수가 껑충껑충 뛰었고, 경기가 끝나자 김주성 선수 등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을 돌았다. 그리고 나오던 TV의 아나운서 멘트. “국민 여러분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나갑니다. 한국 축구의 ‘숙원’을 이뤘습니다.” 당시는 말레이시아, 태국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

그리고 32년이 지났다. 한국은 9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숙원’이라던 월드컵 본선을 단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다. 4년마다 정례화된 본선 진출은 시민들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32년간의 개근은 대단한 성과다. 이탈리아도 진출하지 못한 러시아 월드컵 본선이었다. 페루는 36년 만에, 파나마와 아이슬란드는 처음으로 본선 무대를 밟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월드컵 본선은 시작부터 식어 있었다. 대표팀에 대한 여론은 줄곧 냉소적이었다. 이해는 된다. 역대 본선 중 가장 나쁜 성적이 예상됐다. 자칫 본선에도 못 나갈 뻔한 팀이었다.

월드컵 얘기를 길게 꺼낸 것은 한국 축구가 처한 상황이 한국 경제와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묘하게도 한국 경제가 본격적으로 발돋움한 시기도 1986년부터다. 한국은 3년 연속 10% 성장을 이루며 ‘숙원’이라던 1인당 국민총생산(GNP) 5000달러를 돌파했다. 그러면서 말레이시아, 태국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본격적으로 경제격차를 벌렸다. 이제 1인당 국내총생산(GDP) 3만달러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는 “말레이시아는 과거 한때 한국과 같은 수준이었지만, 지금 한국은 우리가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경제성장을 일궜다”며 부러워한다.

하지만 국내 어디에서도 축하의 말은 없다. 비관론이 비등하다. 내수는 죽고, 성장동력은 떨어졌다고 한다. 기업 간 양극화는 더 심해지고 있다. 일자리 창출은 7만개 수준으로 축소됐고, 청년실업률은 10%를 넘어섰다. 당장 내년이 보이지 않는다고 우려한다. 이러다 선진국 문턱에서 밀려나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있다. 그러니 샴페인을 터트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동반 성장해온 한국 경제와 한국 축구가 ‘선진국 깔딱고개’에서 함께 힘들어하는 것을 우연으로 보기 힘들다. 경제도, 축구도 선진국 클럽에는 들어갔지만 체질전환을 채 이뤄내지 못했다. 투혼과 정신력을 앞세운 단기성과주의는 여전하고, 인맥과 학맥으로 점철된 인사구조도 유효하다. 낯설더라도 고효율의 고부가가치로, 공정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빨리 전환해야 한다.

그 작은 시작이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일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내 최장 근로시간, 최저 생산성의 고리를 끊지 않고는 한국 경제의 미래를 논하기 어렵다. 재벌의 반칙에 단호히 대처하는 것도 필요하다. 실업급여 등 사회안전망도 적극적으로 확충해야 한다. 그런 토대 위에서 노동유연화와 규제완화 같은 난해한 문제의 해법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시작부터 저항이 만만찮다.

“오늘의 결과가 지금 대한민국 축구의 현실이다. 이제 한국 축구는 ‘보여주기식’에서 벗어나 우리의 인프라와 노력을 점검해보고, 시스템부터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않으면 4년 후에도 이러한 패배는 거듭될 것이다.” 해설가로 변신한 박지성 선수의 일침에 뜨끔해진다. 자문해보자. 우리는 지금 개혁을 위한 준비가 돼 있는가.

<박병률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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