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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에 대한 기억 한두 가지는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내 기억 속 자전거는 초등 5학년 때 아버지가 어디선가 구해온 중고자전거다. 말끔하게 칠까지 새로 한 자전거를 처음 탄 날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잡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아버지의 말에 속아 ‘씨익씨익’ 앞만 보고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가 더 이상 뒤뚱거리지 않을 때쯤, 뒤에서 아버지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날로 자전거는 나의 ‘애마’가 됐지만, 얼마 타보지도 못하고 도둑맞는 바람에 자전거를 찾아 동네를 샅샅이 뒤졌던 기억이 더 많다. 누군가는 저녁노을이 질 무렵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내달렸던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연인과 자전거를 타며 나눈 속삭임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탈것 중 자전거에는 그만큼 각별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돌아보면 자전거는 발명 이후 가장 진보하지 않은 이동수단일 것이다. 지금의 모습을 갖춘 자전거가 대중화된 게 1890년대쯤이라고 하니 12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페달을 발로 구르는 형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자전거 여행>에서 김훈이 말한 대로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자전거는 한때 자동차의 증가와 함께 이용률이 급락했지만, 친환경 탈것이라는 이미지와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시 이용이 늘어나는 추세다. 자전거의 천국으로 알려진 네덜란드는 국민 1인당 1.1대의 자전거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네덜란드 사람들의 자전거 사랑은 환경 의식이 남달라서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교통비가 워낙 비싸고 대부분이 평지여서 자전거만큼 훌륭한 이동 수단이 없어서다. 게다가 ‘탄소 제로’ 교통수단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결국 시민들은 스스로의 삶에 더 이로운 것을 찾은 것이다.

한국에서는 공유자전거가 자전거 이용률을 높이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공유자전거의 인기 역시 건강이나 환경보호 같은 거창한 목적보다는 값싼 데다 편리성까지 갖췄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에겐 자전거가 교통수단의 하나로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자전거 도로 등 일상에서 자전거를 안전하게 탈 수 있는 인프라 부족이 가장 큰 이유다. 마침 지난 3월 행정안전부는 도로교통법을 개정하면서 자전거 헬멧 의무화도 포함시켰다. 오는 9월28일부터는 자전거를 타려면 헬멧을 써야 한다. 헬멧 의무 착용에 대해선 벌써부터 말이 많다. 공공자전거 ‘따릉이’를 2만대 이상 운영하는 서울시는 다음달부터 여의도 일부 따릉이 대여소에 헬멧을 시범 비치하기로 했다. 공공자전거가 안전 문제를 도외시한다는 따가운 시선을 피하지 못해 내놓은 대책이다. 그러나 찜통 같은 더위에 헬멧을 쓰고 자전거를 이용할 이가 얼마나 될지는 의문이다.

덴마크에는 ‘사이클 시크’라는 말이 있다. 2006년 코펜하겐에서 시작된 라이프 스타일 운동으로 ‘패셔너블한 일상복을 입고 도심과 어울리게 자전거 타기’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있다. 다만 사이클 시크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자전거 외에 관련된 제품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헬멧을 착용하지 않는 것을 들 수 있다. 헬멧의 의무착용이 오히려 많은 사람이 자전거를 이용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유럽 등에서 자전거가 하나의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은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큰 것은 자전거 이용자들에 대한 배려다. 헬멧을 쓰지 않아도 안전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자전거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것 말이다.

서울은 어떤가. 자전거 전용도로는 부족하고, 도로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니 자전거를 타려면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사소하지만 반복되는 불편함으로 자전거를 포기하지 않도록 도시 환경을 조성해야 자전거 이용자가 늘어날 것이다. 값비싼 자전거에 몸에 붙는 쫄바지, 헬멧을 착용해야만 자전거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다. 따릉이를 타는 당신도 ‘자전거 시크’ 못하란 법 없다.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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