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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부모들의 할 일이 많아집니다.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는 아동의 연령과 관련하여 해외사례를 조사해주시고, 관련 방향으로의 입법화에 대한 검토를 요망합니다.’ 


“아이고. 이런 조사·분석 요구서가 또 왔네. 이런 식으로 정책이 가면 안되는데, 어쩐담.” 


내가 국회입법조사처라는 기관에서 여성·가족을 담당하는 입법조사관으로 근무한 지도 벌써 4년하고도 2개월이 흘렀다. 2009년 3월 근무를 시작할 당시만 하더라도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등은 모두 고용노동부의 업무임에도 불구하고 관련 내용의 조사·분석 업무가 한동안 나에게 배정이 되었다. 당시 조사·분석 요구의 내용 중에서 육아휴직 관련 건수는 1년에 최소한 20~30개는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육아휴직급여의 현실화, 육아휴직 사용으로 인한 불이익 해소, 관련한 해외사례,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는 아동의 연령 조정 검토’ 등의 조사·분석 요구의 취지는 한마디로 육아휴직제도의 활성화이다. 


지난 4일 정부가 ‘고용률 70% 로드맵’을 발표하였고, 핵심 내용 중 하나는 “3개월 출산휴가 직후 1년 ‘자동 육아휴직’ 정착, 육아휴직 후에도 1년간 단축근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내용은 심히 우려스럽다.


정책에도 일종의 동향, 추세가 있다.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소위 저출산이 국가재생산의 위기로 인식된 이후, 일명 ‘일·가정 양립 지원책’이 주요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경향DB)

‘일·가정 양립 지원정책’의 핵심에는 보육정책, 육아휴직제도, 가족친화적 환경 조성 등이 있다. 육아휴직제도는 지속적으로 입법부와 행정부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제도이다. 비록 좋은 취지로 시작했지만 ‘일·가정 양립 지원정책’은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여성들로 하여금 ‘일과 가정’을 양립하게 하다가 과로사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보육시설에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것도 거의 여성이고, 상용근로자 여성의 임금 평균이 남성의 62%인 수준임을 감안하면 임금수준이 낮은 여성이 육아휴직을 사용할 가능성이 크다. 


가사와 육아에 대한 책임이 여성으로 인식되어 있는 사회에서 육아와 직장을 병행하고자 시간제를 ‘선택’할 사람도 여성일 공산이 크다. 육아휴직, 단축근무, 시간제는 가뜩이나 저임금으로 인한 경력단절이 심각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의 경력단절과 직장에서의 주변화를 부추길 우려가 있다.




육아휴직제도 및 단축근무의 전제는 “어린 자녀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은 부모(여성)에게 있다”는 가정보육을 내용으로 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육아휴직제도 활성화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을 때를 떠올려 보라. 저소득층 노동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영아전담 보육시설이 한 해에 100곳 이상 문을 닫는 일이 몇 년 동안 계속됐다.


여성들을 일·가정 양립하게 하다가 죽은 귀신으로 만들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동네 곳곳에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영아전담 보육시설을 늘려야 하지 않을까?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는 아동 연령의 상향 조정보다는 초등학교와 지역사회가 아이들을 잘 돌봐주는 게 낫지 않을까? 


소위 가족정책은 노동시장에서의 장시간 근무 해소, 시간제가 아닌 정규시간에 근무하는 반듯한 직원 채용 확산, 가족 내 보호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학교시스템의 변화 등과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여가친화적인 정책’ 등 이런 내용의 조사·분석 요구서가 의원실 쪽에서 쏟아진다면 과로사를 각오하고 더욱 신나게 회답서를 작성할 텐데 말이다.



조주은 | 국회 입법조사관·‘기획된 가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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