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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언론 꼴이 말이 아니게 됐다. 기자라고, 언론인이라고 낯 들고 다니기가 어렵게 됐다. 한국방송공사(KBS)의 이른바 ‘일베 기자’ 논란은 한국 언론의 현주소와 함께 한국 사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또 그가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라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비난하거나 배척할 일은 아니다.

다만 그가 일베에 썼던 글이 그의 평소 ‘생각’을 정직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는 기자라는 직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생리휴가를 가고 싶은 여성은 인증을 받아야 한다’는 등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삐뚤어진 생각을 갖고 있는 그가 제대로 사회의 제반 현상을 다면적으로, 심층적으로 살펴봐야 할 기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공영방송으로 그 어느 언론보다 ‘공정함’과 ‘공평함’을 보도의 제1원칙으로 내세우고 있는 KBS에서 일할 수 있을까.

놀라운 점은 그런 그가 기자를 하려 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현실화됐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지난 1, 2년 사이에 무려 6000여건에 이르는 왕성한 글쓰기를 통해 일베에 온갖 험한 말을 쏟아냈다고 한다. 여성에 대한 비하와 폄하, 특정지역과 정치인에 대한 혐오와 공격,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조롱 같은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KBS 기자 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그의 ‘생각’과 ‘신념’이 갑자기 바뀌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KBS라는 더 넓은 무대에서 한껏 펼쳐 보일 작정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괜찮은 직업으로서 기자를 선택했던 것일까? 요즘 기자와 언론에 대한 사회적 평판이 오죽했으면 이런 기자 지망생이 나왔을까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중요한 점은 그의 일베 행적이 고스란히 드러났음에도 그의 꿈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KBS 구성원 다수가 KBS의 신뢰성과 기자의 정체성 훼손을 이유로 그의 기자직 임용에 반대했음에도 KBS는 그를 기자로 정식 임용했다. 비록 보도를 하지 않는 부서로 파견 보냈다고 하지만, 그는 엄연히 공영방송 KBS 기자의 신분을 취득한 것이다.

KBS는 그의 과거 행적을 문제 삼기에는 법적으로 무리가 있다는 해명을 내놓았다. “외부 법률 자문 결과 사규나 현행법에 저촉돼 임용 결격 사유가 발생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법적인 판단일 뿐이다. 기자의 자격과 기준은 법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것은 법적 규준보다 훨씬 높은 직업윤리를 필요로 한다.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관련 일러스트 (출처 : 경향DB)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그에 대한 내부 평가다. 수습 과정에서 내부 평가가 ‘사규에 정해진 기준’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 실제 그는 꽤 좋은 평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기자로서는 결정적인 결격 사유가 드러난 마당에 그에게 ‘좋은 점수’를 주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본인을 위해서라도 기자가 아닌 다른 길을 가도록 권유하고, 그것을 뿌리친다면 ‘법의 논리’에 의탁할 게 아니라 저널리즘의 원칙에서 합당한 조치를 취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일베 기자가 아니라, 일베 기자를 무기력하게 용인한 KBS의 행태가 더 문제인 까닭이다. 그렇다고 그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연합뉴스 박노황 신임 사장의 ‘애국 행보’ 또한 언론의 오늘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는 취임 후 첫 외부행사로 현충원을 찾았다. 또 연합뉴스와 계열사 임직원 80여명을 모아놓고 뜬금없이 국기 게양식을 가졌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등을 하고 그는 이날의 행사에 대해 “국가 기간 통신사로서 연합뉴스의 정체성과 위상을 구성원 모두가 재확인하는 자리”라고 했다. 애국심이 철철 넘치는 애국 사장, 애국 언론의 출현을 선포한 셈이다.

그가 평소 얼마나 애국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그의 넘쳐나는 애국심을 탓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신임 사장으로서 보이고 있는 행보를 보면 그의 애국심은 정작 언론의 길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조직개편과 인사를 통해 연합뉴스 구성원들이 어렵사리 마련한 편집권 독립장치인 편집총국장과 편집국장 등 편집국 주요 국장에 대한 기자 임명동의제를 무력화시켰다. 되레 이들 제도가 회사의 경영권과 인사권을 침해한다며 공박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의 애국심이 언론의 독립성이나 자율성을 외면하고 왜곡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애국심으로 포장한 편협한 권위주의의 발로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일베 기자나 애국 사장이나 언론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언론을 우스운 꼴로 만들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백병규 | 미디어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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