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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장 구조개혁’을 놓고 협상을 벌여온 노사정 논의시한이 오늘로 다가왔다. 3월 말이라는 시한은 박근혜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정한 것인데, 그걸 따른다는 사실 자체가 이 협상의 주도권이 애초부터 정부에 있음을 말해준다.

이번 협상에서 정부는 직접 나서기보다 ‘전문가그룹’이라는 대변인들을 내세웠다. 최저임금 결정에서 노사 양측만이 아니라 ‘공익위원’이란 이름으로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교수·학자들을 내세우듯 말이다. 박근혜 정부의 태도가 심하게 사용자 측에 기울어져 있음을 반영하듯, 전문가그룹이 내놓은 의견 역시 노골적으로 사장님들을 편들고 있다.

비정규직 사용기간 2년 제한은 고용불안을 야기하니 조건을 달아 4년으로 연장하자, 파견 관련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 직무와 숙련에 기초한 임금체계로 개편하자…. 어쩌면 이렇게 정부의 친(親)자본 편향을 꼭 빼다 박았을까? 결국 사장님들이 기간제와 파견노동자를 대량 양산하고 자유롭게 쓰다가 해고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이다. 갓 입사한 장그래에겐 최저임금만 주는 직무급제, 숙련이 높아진 김 대리에겐 성과급제, 근속이 오래된 오 과장에겐 임금피크제라는 ‘3종 선물세트’가 주어진다.

실업급여 개선 등을 논의하는 사회안전망 파트엔 좀 괜찮은 내용이 있지 않을까? 천만의 말씀! 전문가그룹은 현재의 실업급여가 저임금 노동자들 임금수준보다 높아서 재취업에 적극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망발까지 일삼는다. 그래서 취업 알선을 거부할 경우 제재수단을 도입해야 한다고 점잖게 충고한다. 전문가그룹에 들어 있는 교수와 학자들부터 비정규직으로 돌려야 한다. 그래야만 비정규직과 저임금 노동자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오늘 노사정 협상에서 뭔가 합의가 나오면 후속 처리는 국회나 국무회의가 맡게 된다. 시행령이나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국무회의는 박근혜 대통령 말 한마디에 좌우되므로, 합의 내용이 아니라 대통령 뜻에 따라 일 처리가 될 것이다. 야당과 협상해야 하는 국회 논의라고 뭐가 다를까? 비정규직 악법을 만든 당사자가 바로 새정치민주연합이다. 비정규직 관련 정책에서는 새누리당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정치적 명분을 쌓기 위해 공방전을 펼치다가, 결국 비정규직 양산과 차별을 확대하는 입법에 합의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노사정 합의가 이뤄지면 언론들은 ‘대타협’이라 떠들어 대겠지만, 사실은 엄청난 피해를 야기할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게 된다. 민주노총은 이미 협상 자체가 사기임을 주장하며 총파업을 선언했고, 한국노총만 논의에 참여하고 있기에 ‘대타협’ 운운하는 게 우스운 꼴이다. 국무회의와 국회에서는 더 흉측한 괴물들을 만들어낼 것이고, 사장님들은 법·제도를 악용해 온갖 잡귀들을 만들 태세이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올 괴물들은 노조로 조직되지 않은 장그래들,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가난한 노동자들부터 공격할 것이다. 노조로 조직된 경우에는 최소한의 저항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노동시장 구조개편 논의 시한을 이틀 앞둔 30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해체를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_ 연합뉴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소속 노조들 중 조직력이 취약한 비정규노조나 지역노조가 피해를 입을 공산이 크다.

‘협상(negotiation)’이란 단어는 본래 라틴어의 negotium에서 유래하는 말로, neg(부정사)와 otium(여가)의 합성어이다. 사전적 의미로 보자면 ‘여가 없이 일하다’라는 뜻이다. 주말에도 쉬지 않고 노사정 협상이 이어졌다.

판도라의 상자를 끝내 열고자 한다면, 장그래의 희망도 함께 발동시켜야 한다. 민주노총 총파업이 장그래들에게 비빌 언덕을 제공하자. 숨죽이고 있던 그들이 분노의 댓글을 넘어 직접 노조로 단결할 수 있도록! 최저임금 1만원을 내걸고 저임금 노동자들이 직접 진출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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