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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십대 초반의 직장인 남성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했는데 결혼 후 그들 관계는 급전직하로 변화했다. 부부는 늘 갈등상태에 있었고 자주 격렬한 싸움을 벌였으며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되는 지점에 도달했다. 그들은 무모하게 헤어지기보다는 함께 문제를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해보기로 했다.

두 사람은 우선 삶의 모델이 되어 줄 것 같은 선배들의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그러면서 저마다 자신의 문제를 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결혼하면서 처음으로 부모를 떠나 자립했고, 어른으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해내기 어려울 때마다 상대방을 탓하고 있음을 알았다. 또한 아기처럼, 혼자 해결할 수 없는 감정 문제를 상대방이 돌봐주기 바랐으며,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마다 떼쓰는 아이처럼 굴곤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부부는 저마다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남편되는 이는 자기를 알기 위한 방편으로 ‘자기 역사 쓰기’를 시작했다.

마음을 치유한다는 것은 우선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상담 전문가들은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문제를 진단하고 지지와 격려를 보낸다. 정신분석이란 ‘성인이 되어 다시 하는 인생 이야기’이다. 성인의 입장에서 과거를 돌아보면 성장기에 오해에서 비롯된 마음 상함, 부모에게 물려받은 잘못된 자기 이미지, 미숙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비효율적인 생존법들을 알아차릴 수 있다. 프로이트 학파도, 융 학파도, 심리학에서도 심리 치료의 기본에는 자기 이야기 다시 하기, 이야기 회복하기 등의 작업이 있다는 공통된 제안을 한다. 전문가를 찾아가 상담을 받을 여건이 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혼자 할 수 있는 치유 작업으로 ‘자기 역사 쓰기’를 권한다.

학자들은 자기 역사 쓰기를 할 때 ‘삼대 삼차원’의 관점에서 기록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부모와 조부모의 삶의 역사부터 이해해야 그 연장선상에서 자신의 현재 모습을 짚어낼 수 있다. 또한 개인사와 가족사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역사를 기록해봐야 한다. 가령 1930년대 우리나라에서 ‘아내에 의한 남편 살해율이 세계 최고였다’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당시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 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처럼. 삼대 삼차원의 관점에서 자기 역사를 쓸 때도 또한 삼단계의 글쓰기 깊이가 있다. 객관적 사실들에 대해 쓰기, 그 사실들에 대한 생각 쓰기, 생각보다 더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감정 쓰기가 그것이다.


▲ “‘과거’가 아프고 부끄럽다는 이유로
회피하고 봉인하려고만 하나
젊은 세대가 힘든 이유도 해법도
모두 ‘거기’에 숨어 있는데…”


우연한 기회에 나는 앞서 말한 이의 자기 역사 쓰기 원고를 검토하게 되었다. 500장쯤 되는 그의 원고에는 객관적 사건과 그에 대한 관념들은 잘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감정 쓰기 영역은 비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 영역을 세세하게 탐사하면서 기존의 원고 위에 다시 한 번 감정의 역사를 덧쓰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느끼는 마음의 불편함 속에 불안과 죄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부부싸움을 할 때조차 자기가 잘못했다고 여겨 매번 물리적 심리적 패배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삶 앞에서 머뭇거리는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역사 쓰기 끝에 그는 마침내 아버지를 찾아가 가족의 역사를 들려 달라고 청했다. 온 가족이 함구해온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거절하다가, 망설이다가, 마침내 아들에게 “네가 이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런 다음 아버지가 해준 이야기는 빨치산의 역사와 거기에 얽혀 있는 삼촌 고모들의 가족사였다.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집을 나온 후 그는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엉엉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늑골보다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울음을, 몸이 녹는 느낌으로 오래 토해냈다. 평생토록 자신을 위축되게 했던 불안과 죄의식의 뿌리가 환하게 보였고, 울음과 함께 그 모든 감정들에서 풀려나는 느낌이었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허탈했다.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않은 그 사건 때문에 평생토록 불편했다는 사실도 마저 소화시켜야 했다. 이후 그는 새롭게 탄생한 듯한 경험을 했으며 생에 대해 건강한 비전을 갖게 되었다.

부모 세대가 해결하지 않은 문제, 회피하고 봉인해온 기억들로 인해 젊은 세대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다양한 방식으로 목격하곤 한다. 이십대 후반의 여성은 늘 불안과 수치심 같은 것 때문에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곤 했는데, 그녀가 찾아낸 불편한 감정의 뿌리는 자신이 혼전 임신된 아기였다는 사실이었다. 요즈음이야 혼전 임신을 축복받은 혼수처럼 여기지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혼전 임신은 쉬쉬하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풍족한 환경에서 귀하게 자란 삼십대 중반 여성은 가끔 내면에서 올라오는 “돈이 참 무섭다”라는 목소리를 듣곤 했다. 그녀는 가난에 대한 불안 때문에 인간적으로 참 좋은 남자들을 떠나보내곤 했다. 내면을 깊이 탐사해본 후에야 그것이 억척스럽게 자수성가한 아버지 목소리였음을 알게 되었다.

개인의 비밀이든 가족의 비밀이든 그것은 당사자가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한 사실을 일컫는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세르주 티스롱은 <가족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비밀은 삶의 기쁨을 해치고, 생각의 자유와 관용, 나아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용기를 파괴한다. 가족의 비밀은 정치계나 조직 내에서 행해지는 비밀주의와 차원만 다를 뿐, 모든 전체주의 체제와 다를 바 없는 해악을 구성원들에게 끼친다.”

지금이라도 부모 세대가 묻어둔 기억을 꺼내고 회피해온 감정을 경험해서 자기 것으로 끌어안으면 더 이상 자녀에게 아픈 것들을 물려주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기억을 잘 봉인할수록 잘 해왔다고 믿는 부모 세대의 신념은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를 회피해온 이들은 다음 세대에게 한국사를 가르치려 하지 않고, 국사 속에서 근현대사의 비중을 축소하려 한다. 지금 우리 젊은 세대가 힘들어하는 이유와 해법이 모두 그곳에 있는데, 그것을 더 깊이 묻으려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 젊은이들은 부모를 이해하는 길도, 불편을 해결하는 방법도 잃어버리고, 마침내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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