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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내용이 대체로 두 가지다. 자기 이야기를 하거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말을 듣기보다는 그의 이야기가 끝나고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를 엿본다. 상대의 말꼬리를 끊고 자기 이야기를 밀어넣기도 한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점잖은 목소리로 이웃과 사회를 걱정한다. 특정인을 화제로 올리고 그를 판단·평가하는 데 열을 올린다. 자기 얘기만 하는 사람과 남의 얘기만 하는 사람이 만나면 한쪽은 상대방을 자기밖에 모르는 미숙아로 취급하고, 다른 한쪽은 상대방이 속내를 내놓지 않는 음흉한 사람이라 여긴다.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피하고자 특정 분야의 객관적 사실을 언급하면 잘난 척한다는 오해를 받는다.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한 가지 사실이 명백히 보인다. 누구도 자기 자신을 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이상화된 자기 이미지에 치우쳐 있고 그런 자신을 펼쳐 보인다. 혼자 소화하지 못한 감정을 외부의 누구에게든 쏟아내기 위해 이야기하는 이도 있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향해 시기심과 불안을 투사한다. 그들의 말 속에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이, 불편한 감정에 짓눌린 아이, 타인의 성취를 파괴하고 싶어 하는 아이가 존재한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인간에게는 무의식이 있고, 그것이 모든 병통의 원인이며, 무의식을 의식 속으로 통합시켜야 심리적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실을 제안한 이후, 현대 심리학자들은 무의식 대신 ‘내면 아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내면 아이는 무의식보다 이해하기 쉽고, 접근과 해결이 쉬워 보인다.

젊은이들이 삶에서 겪는 심리적 불편을 해결하고 싶다고 말하면 나는 먼저 ‘내면 아이’에 관한 책을 읽어 보라고 권한다. 책을 읽은 이들은 자기 내면에 상처 입은 채 웅크린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내면 아이는 감정이나 욕구를 표현하지 못하도록 억압당했거나,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 목록에 발목이 잡혀 있거나, 외부 대상의 눈치를 보면서 순응적 태도를 취하거나 한다. 외부에서 오는 보살핌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결핍감에 사로잡혀 있거나, 가족의 불행을 자기 탓으로 느끼며 너무 많은 책임을 떠맡기도 한다. 성인으로서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 속에 아이 때의 인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런 질문이 이어진다. “내면 아이는 어떻게 만나나요?” 이 질문은 “나는 한번도 자기성찰을 해본 적이 없어요”라는 문장과 동의어이다. 늘 화를 내면서도 내면에 ‘화내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늘 의존할 대상을 찾아다니면서도 내면에 ‘엄마가 필요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뜻이다. 분노나 의존성을 알아차릴 ‘성인 자아’가 없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그냥 아이’인 상태로 반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이들을 위해 내가 찾아낸 대답은 “격한 감정이 올라올 때, 그것이 내면 아이다”라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매 순간 자기를 성찰하는 것은 종교 수행자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보통 사람인 우리가 자기를 알아차리기 가장 좋은 순간은 외부의 자극을 받아 내면에서 격한 감정이 올라올 때이다. 사촌이 논 샀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배가 아플 때 그것이 ‘나만 덜 받았다고 느끼는 아이구나’ 알아차리는 것이다. 데이트 제안을 거절당했을 때 뜨거운 화가 치밀어오르면 그것이 ‘사랑에 차별당했다고 느끼는 아이구나’ 이해하는 것이다. 소홀하게 대접받는다는 느낌 앞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오르면 그것이 ‘무시당했다고 느끼는 내면 아이구나’ 인식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격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이미 그러한 문제로 상처받은 아이가 내면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무시당한다는 느낌’에 취약한 사람은 초기 대상관계에서 아이를 존중하지도 배려하지도 않는 양육자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 부모는 아이의 의사나 욕구는 무시한 채 자신의 방식과 가치만을 아이에게 강요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 부모는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 애쓰면서 타인이 자기를 무시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아이에게 물려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들은 취약한 내면을 감추기 위해 겉으로 더욱 도도하고 거만한 태도를 취한다.

내면 아이를 이해하고 그 실체에 접근해갈 때 어떤 젊은이는 이렇게 묻는다. “내면 아이는 몇 살인가요?” 심리학 책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엉뚱한 질문이지만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누구나 트라우마의 시기에 고착되어 있다는 점이다. 유아기 엄마의 긴 공백이나, 대체 양육자에게 맡겨졌던 일이나, 가족의 사건 사고 같은 것. 혹은 아이의 욕구에 지속적으로 어긋나는 양육방식도 아이를 얼어붙게 만든다. 최근에는 인큐베이터에서 양육된 성인의 내면에 근원적으로 불안한 내면 아이가 자리 잡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내면 아이 문제를 이해해 나갈 때 마지막에 하는 질문은 “내면 아이는 자랄 수 있나요?”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성인 자아와 내면 아이를 분리해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화가 날 때마다 마구 화를 낼 게 아니라, 성인 자아가 ‘화내는 내면 아이’를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무시당한다는 느낌 때문에 화가 나는구나, 하지만 이 감정은 오래전 부모에게 무시당했다고 느끼는 내면 아이의 반응일 뿐, 지금 이곳이 나를 무시하는 상황은 아니야.” 그렇게 알아차리면서 화내는 내면 아이를 스스로 달래줄 수 있어야 한다. 일상 속에서 그런 작업을 반복하면 모든 감정들을 고요하게 처리할 수 있고, 마침내 내면 아이의 목소리마저 조용해지는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건강에 가장 필요한 단어 하나를 꼽으라면 ‘자기 성찰’을 제안하고 싶다. 우리는 내면을 보지 않기 위해 중독 물질에 매달리고, 내면을 회피하면서 타인과 상황을 탓하고, 내면을 본 적 없기 때문에 화가 날 때마다 화를 낸다. 무의식의 의식화, 내면 아이 돌보기, 회광반조(回光返照)는 모두 같은 뜻이다.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릴 줄 아는 것. 그런 사람은 최소한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있다.


김형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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