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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 말이라면 사사건건 반발심이 일던 사춘기에는 스무 살이 되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그때가 되면 어른다운 일을 하면서 어른스럽게 말하고 성숙하게 행동할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생물학적·법률적 성인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내가 알아차린 단 한 가지 사실은 “어른도 별게 아니구나”였다. 스무 살이 되어도 나는 어른이 되어 있지 않았고, 둘러보면 또래들 모두 미숙하고 비릿한 아이처럼 보였다. 혹시 우리가 ‘어른’이라는 말에 지나치게 큰 환상을 부여해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아마 그때부터 어른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집중적으로 자서전이나 평전을 읽으며 그들은 어떻게 절망을 넘어서고, 위기에 대처하면서 어른으로서의 삶을 살았는지 알고자 했다. 많은 이들의 삶을 종합하면 성숙한 삶의 기본 패턴이나 비밀 열쇠 같은 것이 있을 듯했다.

에릭 에릭슨은 인간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여덟 단계가 있다고 제안한다. 유아는 생애 초기부터 2세까지 엄마가 돌보는 방식에 의해 신뢰감이나 불신감을 갖게 된다. 엄마의 보살핌이 아기의 기대를 충족하는 안정된 방식이라면 아이는 외부 환경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2세부터 3세까지는 부모의 사랑과 관대함에 의해 수치심과 자립심이 자리 잡는다. 아기를 자주 야단치는 부모는 수치심을 심어주고, 아기에게 일관되게 사랑을 주는 부모는 자립심을 형성시킨다. 자신을 믿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 감각을 키워준다. 하지만 우리는 10대 내내 자립심 대신 부모와 교사 말을 잘 듣는 것을 배웠고, 세상이 위험한 곳이라는 메시지를 듣고 자랐던 것 같다.

직장생활을 하며 세상을 배워가던 20대에는 서른 살이 되면 삶이 좀 수월해질 줄 알았다. 지혜가 없어 매사가 어렵게 느껴지고, 미숙해서 어떤 일을 하든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서른 살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때가 되면 세상이 한눈에 조감되고 삶의 길목에도 가로등 같은 것이 켜져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내가 알아차린 단 한 가지 사실은 삶의 무게나 방향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양치질을 200만번쯤 하거나, 500만그릇의 밥을 먹어치우는 것이 삶은 아닐 텐데 싶기도 했다. 아마 그때부터 삶의 의미를 궁금해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에릭슨은 정신 발달 단계에서 아기는 3세부터 5세까지 죄의식과 창의성이 갈린다고 한다. 가정이 건강하게 잘 기능하는 환경이라면 아이는 자기 생각을 마음껏 펼치며 창의성을 키워 가지만 병리적 가정에 적응하느라 온 힘을 빼앗기는 아이는 창의성 대신 죄의식을 안게 된다. 6세부터 12세까지는 아이의 정신에서 열등감이나 근면성이 형성된다. 학습을 시작한 아동은 자립심, 창의성을 바탕으로 주어진 학습을 근면하게 해내든지, 수치심과 죄의식 위에 열등감까지 떠안게 되든지 갈린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창의성과 근면성을 발휘해야 하는 시기에 나는 자주 죄의식과 열등감에 시달렸던 기억이 있다.

삶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인류의 지혜가 담긴 책들을 읽어나가던 30대에는 마흔 살이 되면 삶이 고요해져 있을 줄 알았다. 그때쯤이면 세상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답을 가지고 있고, 인간의 마음 바닥까지 이해해 고요한 마음으로 그윽한 삶을 유지할 줄 알았다. 하지만 마흔 살이 되었을 때 내가 알아차린 사실은 마흔 살을 불혹이라 명명한 이유였다. 그때가 되면 마음이 더욱 치성하게 외부 자극과 유혹을 향해 내달리기 때문에 경계하는 차원에서 그런 이름을 지은 듯했다. 그때부터 비로소 세상과 관계 맺으면서도 내면에서는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 “스무 살, 서른 살, 마흔 살이 되면
더 성숙해 있을 것이라 믿었는데
여전히 멀리 있는 듯한 삶의 의미
다시 일흔 살, 여든 살을 꿈꾼다”


에릭슨의 발달이론에서 12세부터 18세까지 청소년기에는 정체성이 형성되거나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상황을 맞게 된다. 그 시기에 친구, 외부 집단과 접촉하면서 의미있고 풍요로운 자기 개념을 만들거나, 외부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관계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리는 현상을 맞는다. 19세부터 35세까지 청년기는 친밀감과 고립감이 교차하는 시기다. 애착 대상, 경쟁과 협력 대상들과 관계 맺으며 친밀감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거나, 그들로부터 후퇴하여 고립되는 삶을 추구하게 된다. 나는 청춘기 내내 내가 누구인지 혼란스러웠고, 이따금 사람들로부터 먼 곳을 찾아가 혼자 조용히 지내곤 했다.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내면을 탐구하던 40대에는 쉰 살이 되면 삶이 담백해져 있을 줄 알았다. 무엇인가를 구하기 위해 분주하던 마음도 쉬고, 떠들썩하게 어울리는 일에도 흥미가 없어질 거라 믿었다. 담백하고 단출한 삶 가운데서 오직 내면의 풍요로움을 향유하고 싶었다. 하지만 쉰 살이 되었을 때 알아차린 사실은 여전히 세상과 질긴 미련으로 얽혀 있다는 점이었다. 그때부터 탐심을 내려놓으며 단순한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에릭슨은 36세부터 65세까지 장년기는 인간 정신에서 침체성과 생산성이 교차하는 시기라고 제안한다. 이전의 생산적 정신 기능을 계속 유지하거나, 자의나 타의에 의해 노동 생산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노동 생산성뿐 아니라 삶 전체도 계속 생산적인 상태를 유지하거나, 그렇지 못하거나로 갈린다. 나는 지금 이 시기에 있다. 삶의 형태는 단순하게, 내용은 생산적으로 살기를 꿈꾼다.

삶을 십진법 단위로 나누어 인식하는 일이 합당한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무슨 주문처럼 “서른 살이 되면, 마흔 살이 되면…” 하는 기대를 품곤 했다.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삶의 내밀한 방식이나 의미 같은 것이었다. 200만번의 양치질이나 500만그릇의 식사 말고, 저축통장이나 집문서 말고, 삶에는 다른 목적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밟은 교육 과정에는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이 없었다.

에릭슨은 65세 이후를 노년기로 잡는다. 노년기에는 정신 영역에서 통합감과 절망감이 갈린다. 삶의 이전 단계를 잘 이행해온 사람이라면 그 모든 정신 자질들이 내면에서 통합되어 건강한 노년을 맞을 것이다. 그는 높은 차원의 도덕적 삶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사람일 것이다. 장년기를 지나며 생산적인 삶을 유지하고자 애쓰는 지금, 나는 또 꿈꾼다. 일흔 살이나 여든 살이 되면….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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