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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늘 지나는 길이었다. 첫 번째 네거리에서 버스가 왼쪽으로 돌자 아파트 단지 담벼락 위 하얀 철제 난간 사이로 붉은 장미꽃들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깜짝 놀랐다. 아니 하루 새 피었을까, 아니면 내가 무심해 몰랐나. 잊지 않으려 휴대전화기에 5월14일을 적어두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서는 건넛집 대문 옆 담벼락을 넘은 장미에 다시 화들짝! 아침에 보고도 못 본 게 분명하다. 그 뒤, 무장 장미가 눈에 띄었다.

해마다 5월15일, 스승의날 앞뒤로 장미가 폈던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으나 올해 장미를 처음 본 날이 5월14일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앞으로 스승의날 무렵 장미가 핀다고 기억할 거다. 이제껏 한번도 그래본 적이 없으면서 이제 와서 굳이 어떤 날을 정해 그것도 스승의날을 장미가 피는 때로 기준 삼겠다는 건, 오로지 한 소녀 때문이다. 소녀의 스승의날 때문이다.

지난해 6월 중순, 안산에 있는 어느 중학교를 찾아갔다. 그 학교를 졸업한 소녀를 알고 싶어서였다. 오후 2시반은 느리고 무더운 시간, 운동장 가장자리를 걷는데 초록 철망을 타고 높이 올랐던 장미들이 남긴 흔적을 보았다. 장미를 보며 등하교했겠구나, 생각하며 교무실로 올라갔다.

2013년 5월 스승의날, 향매는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중학교 선생님을 찾아왔다. 단짝 친구와 함께 예쁘다고 소문난 교복을 입고서 말이다. 이즈음 날씨를 생각하면 더웠을 텐데 굳이 동복 재킷을 챙겨 입은 건 왜였을까. 몇 달 차이 안 나도 중학생과 고등학생은 엄연히 다르다는, 그사이 의젓해진 모습을 선생님에게 보여주고 싶었을까.

스승의 날인 15일 오전 안산 화랑유원지 내 정부합동분향소에서 단원고 학생 희생자 유족들이 희생자 선생님들에게 바치는 편지를 낭독하고 있다._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향매는 운동장에서 학생들과 축구를 하는 선생님을 보았다. 축구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달려가 선생님을 꼭 안아주고 장미꽃을 선생님께 드렸다. 저녁을 먹으면서는 친구와 고등학교 생활 이모저모를 쉬지 않고 선생님한테 들려주었다 한다. 일하러 먼저 한국으로 온 부모님과 4년 동안 떨어졌다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온 게 중학교 2학년 2학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선생님과는 중3 한 해를 함께 보냈다. 선생님도 전근 와서 처음 담임 맡아 그해 아이들이 마음에 더 남았다. 헤어질 때 향매가 말했다. “내년 스승의날에 다시 올게요”라고.

다음해, 스승의날을 한 달여 앞둔 4월 아침. 세월호 소식을 들은 선생님이 다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끝내 향매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선생님은 향매뿐 아니라 담임했던 제자 여럿을 잃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자본과 권력이, 무능한 정부가 제자들을 앗아갔다.

무수한 아이들의 무수한 선생님을 떠올려 본다. 생애 처음 만난 어린이집과 유치원 선생님, 일기장에 아이 마음을 다독이며 글과 그림이 담긴 편지를 써준 초등학교 선생님, 한 가지 특징으로 규정할 수 없는 데다 언제 웃음이 터질지 울음이 터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중학생 시절을 지켜봤을 선생님.

사사건건 간섭해 귀찮았는데 지나고 보니 참 좋은 선생님이었다는 들리지 않는 이야기로 귀가 가려웠을 선생님,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종업식 하는 날 지난 일 년이 행복해 눈물 쏟아내게 했던 선생님, 고등학교로 전근 가 학생들과 제주도 수학여행을 가서는 그 길에 도착하지 못한 옛 중학교 제자가 떠올라 울었을 선생님….

학교 밖 보습학원에서, 공부방에서, 예체능 학원에서 아이들을 만났던 선생님들도 가슴 일렁이긴 마찬가지였을 게다. 그해 구조받지 못한 아이들을 직접 가르친 선생님이 아니더라도 곳곳 교단에 서야 했을 선생님들은, 교단 너머 자기 아이들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할지,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아득했으리라. 그날 이후로 교육에 대해 고민하고 길을 모색하는 일이 더 많고 깊어졌을 것이다.

5월 붉은 장미는 그런 선생님들에게 향매와 친구들이 보내는 선물이지 않을까, 혼잣말을 해 본다. 해마다 스승의날이 오면 선생님을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건만 지킬 수 없게 되어버린, 약속 지킬 기회를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제자들이 세상 모든 선생님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 말이다.


박수정 |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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