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객관적인 데이터 분석은 적폐청산이 촛불 광장의 핵심 어젠다가 아니었다는 점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원래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문재인 후보의 경선 전략이었고, 그가 대선 후보로 확정된 4월3일부터 장미대선이 치러진 5월9일까지 한 달간 폭발적으로 확산되었을 뿐이다. 우연찮게 만들어진 적폐청산이라는 구호는 신성불가침의 원칙처럼 되어버렸고, 인수위 없이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서 두 달 후인 7월19일 대통령이 직접 나서 발표한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의 100대 국정과제에서 1번을 차지했다. 그 후의 일은 모두가 알고 있다. 적폐청산은 국민을 편 가르기 하는 정책을 낳았고, 강성 지지층과 내로남불과 국회 독주의 명분이 되었고, 현장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경제 정책과 부동산 정책을 낳았으며, 결국 정권을 내주는 결말에 이르렀다.
지금 통의동에서 어떤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주고받고 무엇을 결정하느냐도 마찬가지로 윤석열 정부의 성패를 큰 틀에서 결정할 것이다. 아직 새 정부 출범 이전이기 때문에 야당의 견제를 받지도 않고 기존에 내놓은 정책과의 상충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한마디로 5년 임기 중 가장 자유로운 변화의 틀이 만들어지는 시기이다. 지금 무엇을 결정하느냐가 5년을 좌우한다. 그동안의 경험과 정부 성과에 대한 학계의 연구 결과 중 시급한 두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행정부 내 정책 조정의 복원이다. OECD 국가들의 정부 역량을 세분화해서 비교해보면 한국은 정책의 공익성과 조정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가운데 효율성과 실행력은 높다. 쉽게 말해 왜 하는지 모르는 정책을 기어코 해낸다는 뜻이다. 현실에 적용되면 정권이 원하는 정책을 관료들이 어떻게든 만들어준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부동산 정책과 일자리 정책과 균형발전 정책과 보건의료 정책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데 지금은 다 따로 논다. 분야마다 정권의 요구사항이 있고, 각 부처가 밤새워 가며 그에 맞는 정책을 만들고, 기획재정부와 예산 가지고 씨름을 한 끝에 청와대의 ‘정무적 판단’으로 넘어가 버린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정무적 판단을 하는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정치적 신념을 공유하는지라 한쪽으로 치우친 판단밖에 못하고, 전문성도 부족하다. 실제의 정책 결정 과정을 보면 몇몇 정치인 출신 장관을 제외하고 장관의 역할은 없다시피 하다. 간혹 뉴스 화면에 비치는 국무회의 장면을 보면 대통령은 원고를 읽고 장관과 수석들은 받아적는다. 그런데 그 원고는 아랫사람이 써주었을 터이다. 그럼 그 회의는 도대체 왜 하는 것일까. 장관들에게 e메일로 보내면 되지 않을까. 국무조정실에 권한을 부여해서 총리가 정책 조정을 책임지든, 아니면 대통령이 직접 그 역할을 맡든, 아무도 모르는 정책을 그저 열심히 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한다.
둘째, 끈질기게 합의를 만들어야 한다. 단임제하에서 모든 정권은 시간과의 싸움을 벌인다. 처음에는 국민통합과 협치를 외치지만 야당이 1년만 발목 잡고 총선이나 지방선거가 다가오기 시작하면 다급해진다. 이때쯤 되면 대통령은 어느새 정치혐오론자로 바뀌어 있다. 시민단체나 노조를 상대로 한 사회적 합의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안 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으니 결국 협치는 내동댕이치고 폭주기관차가 되어 달리기 시작한다. 결국 그 정부가 했던 일은 다음 정부에서 모두 없었던 일이 된다. 합의를 만들기 위해서는 야당의 첫 번째 임무가 견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대통령의 몸에 밴 철학이 되어야 한다. 야당의 견제 임무를 존중한 상태에서, 커다란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조그만 합의라도 이루고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 약속을 바탕으로 조금 더 큰 합의를 이루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 이 일을 열 번만 반복하면 국민은 대통령이 원하는 거대한 합의에 전폭적인 힘을 실어줄 것이다. 대전환은 작은 변화 열 번이 모인 순간 찾아온다.
이 순간 통의동에서 부디 현명한 결정들이 이루어지고 있기를 바란다. 윤석열 정부의 성패는 이미 결정되고 있는 중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