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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에 거지떼들을 맞이한 각 지방에서는 상하가 모두 당황했다. 이제 부산지구를 중심한 그날 이후의 피난민의 움직임을 보면, 부산 하면 그래도 우리 정부가 엄연히 자리를 잡고 있으니 가기만 하면 어찌어찌 되겠지, 원주민들도 피난민이라고 하면 많은 동정을 하겠지 하였으나, 원체로 많은 피난민(부산지구만 30만명이었다)이 오고 보니 당국의 손도 못 미치려니와 수용할 집이 없어 야단이 났다. … 이래서 몇 달 지나지 않았건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소중히 가지고 내려왔던 옷가지며 패물, 집기 등을 방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있을 수 없다는 옛 성현의 말씀 그대로 경제적으로 비참한 구렁에 빠지게 된 각 계층은 이렇게 완전히 도덕적으로 타락의 구렁으로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 사람이란 때로 이상스러운 만큼 잔악하고 악착스럽고 가축만도 못한 행동을 할 때가 많다. … 한번 습성화한 악습은 여간해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으로 지난날의 경제적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부끄럽게 굴었던 그들의 행동심리는 아직도 농후하게 그들의 언행에 작용함으로써 물욕을 중심한 상호질시, 자기만을 위하는 극도의 개인주의, 부패성의 자기 합리화 등등 모든 건전치 못한 요소는 아직도 뿌리 깊게 우리들의 마음 그리고 이 사회 안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다.”(서울신문, 1951년 12월30일자)

전쟁은 인간이 벌이는 일 중에서 가장 반생명적이다. 전쟁은 생명 존중을 중심으로 구축된 인간다움의 가치들을 전복시킨다. 평시에는 강력 범죄인 살인과 방화도 적에 대한 행위일 때에는 훈장감이다. 전쟁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온갖 정성을 다해 이루어 놓은 문명의 성과들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한다. 전쟁은 사람살이에 필요한 모든 재화를 우선적으로 자기 목적을 위해 할당한다. 총탄과 포탄의 위협 앞에서, 혼란 속의 기근과 질병으로 인해, 생명은 지속성과 안정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젊은 남성들은 전선에서 수시로 죽음과 맞닥뜨리고, 여성과 노인, 어린이들은 거의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된다. 전시의 사람들은 생존의 목적을 생존 자체로 한정한다. 그럴수록 삶과 죽음이 모두 가벼워지고 물질의 가치만 치솟는다.

전쟁은 언제나 인간이 감내하기 어려운 최악의 조건들을 구현해 왔다. 그런 조건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의 밑바닥’은 말 그대로 밑바닥이다. 전시의 인간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수시로 ‘가축만도 못한’ 행동을 한다. “현재에만 충실해라”나 “눈앞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전쟁에 가장 잘 어울리는 금언이다. 누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염치와 양심의 값어치는 한없이 떨어진다. 군인으로든 민간인으로든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 대다수는, ‘인간성의 밑바닥’에 도달해봤거나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전쟁의 피해를 극복하고 그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폐허 상태가 된 물질세계를 재건하는 일일 뿐 아니라, ‘타락의 구렁’에 빠진 도덕성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6·25 전쟁 유엔 참전국 전사자 명비 (출처 : 경향DB)


그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나라를 이만큼 발전시킨 세대에게 헌정된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 <국제시장> 관객이 1000만명을 넘었다. 처자식 먹여살리기 위해 ‘인간성의 밑바닥’에 도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들, 사람으로서 할 일 못할 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해야 했던 사람들을 동정하고, 그들이 선조이기에 감사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이 사회 일각에는 그 시절을 지배했던 의식과 태도,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쟁 중에나 전쟁 직후에나, 자식들에게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 결심이었다. 한국 경제를 성장시킨 견인차 중의 하나는 이 집단적 결심이었다. 이 결심 안에는, 자식들은 ‘인간성의 밑바닥’에 도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염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물욕을 중심한 상호질시, 자기만을 위하는 극도의 개인주의, 부패성의 자기 합리화 등등 모든 건전치 못한 요소’들로 가득 찼던 전시의 인간성을 되살리자고? 이거야말로 전쟁을 겪은 세대의 성취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들의 일생 자체를 모욕하는 짓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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