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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학교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서던 아이가 문 밖에서 주저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던 아이가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학업을 포기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사이가 틀어진 것이 원인이었다. 3년간 아이와 사회를 연결하는 끈은 갈수록 가늘어졌다. 1년 동안은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상담을 받기도 하고 우울증 약도 먹었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최근 발간된 <유유자적 피플>(이충한 지음, 소요프로젝트 펴냄)에 소개된 장면이다.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낯설기는커녕 대중 매체를 통해, 친지나 이웃과의 대화를 통해 하루가 멀다 하고 접하는 ‘한국병’ 중 하나다. 일본발 뉴스를 통해 예방주사를 맞은 탓도 있을 것이다. 20여년 전부터 교실 붕괴, 집단따돌림, 은둔형 외톨이를 소개하는 신문 기사와 방송 프로그램이 끊이지 않았다. 자기계발, 심리학 관련 서적 붐이 식지 않고, 힐링산업이 번창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저마다 안간힘을 다해 성공과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것을 누리는 주인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성공이나 행복은 대부분 미래로 가 있다. 그래서 현재는 오직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시간으로 변질됐다. 미래가 엄청나게 확대된 데 견주어, 과거와 현재는 상대적으로 축소된다. 미래와 과거가 현재를 점령하고 있다. 현재의 위상이 갈수록 왜소해진다. 그래서 ‘지금을 길게, 여기를 넓게 하라’는 인류의 교사들의 가르침은 들을 때마다 새삼스럽다. 끊임없이 유예되는 성공과 행복의 기준에 한정한다면 우리는 획일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획일주의를 추동하는 엔진은 경쟁과 탐욕이다. 하나의 척도만 허용하는 획일주의는 무수한 배제를 낳는다. 승자가 되지 못하면 낙오자가 되는 사회는 영락없는 야만의 사회다. <유유자적 피플>의 저자 이충한씨는 오늘의 한국 사회를 ‘무중력 사회’라고 명명한다. 중력이 갈수록 희박해져서 ‘둥둥 떠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위에 소개한 청소년이 바로 그들 중 하나다. 지난 한 해에만 6만8000명에 달하는 청소년이 학교를 떠났다. 그렇다면 어떻게 중력을 회복해 ‘독거 청소년’을 사회의 중심으로 초대할 것인가.

이충한씨는 즐거움·관계·노동이 건강한 개인을 바람직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중력의 세 요소라고 꼽는다. 이 세 가지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보편적 조건이다. 최인철 교수의 ‘영혼의 3대 영양소’,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의 ‘삶의 위대한 세 영역’도 이와 다르지 않다. 최 교수는 자유·유능감·관계를 강조했고, 셀리그먼은 사랑·일·놀이에 주목했다. 이들 세 요건은 그 어느 것도 개인이 혼자 충족할 수 없다. 타인, 즉 사회적 호응과 교류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유유자적 피플’은 ‘유유자적 살롱’(유자살롱) 출신이다. 외롭고 우울하고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는 무중력 청소년들을 모아 스스로 중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젝트가 유자살롱이다.

은둔형 외톨이였던 청소년들이 3개월간 악기를 배우고 함께 공연하면서 자존감과 자신감을 강화하고 사회성을 회복한다. 유자살롱은 비언어적 소통에 큰 비중을 둔다. 토론이나 글쓰기는 이들에게 지나치게 높은 진입장벽이다. 음악이란 비언어적 매개를 통해 차츰차츰 마음을 열고 서로 손을 내민다. ‘유유자적 피플’의 공식 슬로건은 이렇다. “하고 싶은 일, 즐거운 일을 하면서 먹고살자.”

은둔형외톨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 중인 유자살롱의 강소희씨 (출처 : 경향DB)


최근 일본의 젊은 사회학자가 쓴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민음사 펴냄)이 나왔다. 희망이 없어서 오히려 행복하다는 ‘사토리(得道) 세대’의 안팎을 탐사한 보고서인데 한국 사회와 공통점이 적지 않다. 결말 부분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이제껏 일본은 경제성장만 하면 어떻게든 된다는 생각으로 계속 달려왔는데, 돌연 경제성장이 멈춰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전통이 없는 일본은 모두 망연자실한 상태로,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게 된 것이다.”

일본의 망연자실이 우리의 무중력 상황과 다르지 않다. 무중력 인간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사회 문제다. 특정 세대라기보다 시대의 문제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사회적 중력부터 되찾아야 한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수소문하는 일이 급선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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