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자불어괴력난신(子不語怪力亂神). <논어>의 한 구절이다. 권위를 인정받은 ‘정통’ 해석은 ‘공자께서는 괴상한 것, 힘, 어지러움, 귀신에 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다’이다. 공자 시대 이후 아주 오랫동안 유교 문화권에서 이 네 가지는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것으로서 사람을 미혹시키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주범으로 인식되었다.

우리 문화에서도 유교와 상관없이 ‘힘’은 본래 좋은 것이 아니었다. 몸에 힘이 들어오는 것을 ‘힘 든다’고 하고, 몸 밖으로 힘이 나가는 것을 ‘힘 난다’고 한다. 힘이 들면 괴롭고 힘이 나면 즐겁다. ‘힘’은 사람이 일하는 사이에 슬그머니 몸 안에 들어와 고통을 주다가 쉬는 사이에 몸에서 나가는 귀신과 비슷한 존재였다. 힘은 사람에게 평생 붙어 있는 신체 또는 정신의 일부가 아니었고, 좋은 것도 아니었다. 몸에 힘 들이며 사는 삶이 고생이고, 힘 안 들이고 사는 삶이 호강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개인과 공동체의 도(道)로 삼았던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힘을 숭상하기보다는 멸시했다. 그들에게 힘은 천한 것이었기에, 힘 쓰는 일도 천한 일이었다.

정조 때의 어의(御醫) 강명길은 직접 쓴 의서(醫書) <제중신편>에 “부귀자는 마음을 많이 쓰니 병이 대개 속(本)에서 오고, 빈천자는 수족을 많이 쓰니 병이 대개 겉(標)에서 온다”고 했다. 힘은 수족을 많이 쓰는 빈천자에게나 필요한 것이었다. 마음을 많이 쓰는 부귀자에게 필요한 것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덕(德), 지조(志操), 기개(氣槪) 등 ‘운동 에너지’를 갖지 못하는 가치들이었다.

문제를 힘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도(道)를 모르는 자들에게나 어울리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정도의 차는 있으나, 지구 전역에서 힘은 대체로 반(反)문명과 야만의 상징이었다.

힘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거의 고정되어 있던 물질세계가 급격히 팽창하면서부터였다. 증기기관 발명은 마력(馬力)을 숭상하는 시대를 열었다. 뒤이어 찰스 다윈은 신(神)과 혈연관계에 있던 인간을 동물의 일원으로 재배치했다.

이에 따라 ‘인간다움’을 구성했던 정신적 가치들은 뒤로 물러서고, 주로 힘으로 표현되는 동물의 속성들이 전면으로 나섰다. 이후 적자생존, 우승열패, 약육강식이라는 동물적 경쟁의 논리와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힘, 즉 ‘경쟁력’이 최상의 가치라는 생각이 인류의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부터는 우리나라에서도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라는 맹자의 말은 허튼소리가 되었고, 물질을 만들거나 변화시키지 못하는 관념의 가치는 폭락했다. 1880년대 개화사상가들은 국가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핵심가치는 ‘부국강병’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했고, 1900년대 안창호는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개개인의 생활규범으로 제시했다.

1910년, 한국을 강점한 일본이 처음 한국인들에게 요구한 정신적 가치는 충량(忠良), 온순, 착실 등이었다. 그들에게 지조와 기개를 갖춘 사람은 성가신 ‘불령선인(不逞鮮人)’이었다. 그들에게는 한국인의 ‘실력양성’도 못마땅한 일이었다. 일본인들은 각종 출판물과 인쇄물에서 기생이나 노인을 한국인의 대표 이미지로 삼았다. ‘이민족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연약하고 노쇠한 민족’이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에게 강요된 자의식이었다. 그럴수록, ‘힘’에 대한 한국인의 열망도 높아졌다.

일본 제국주의 통치자들이 한국인들에게 ‘힘’을 권장하기 시작한 것은 침략전쟁에 한국인의 ‘힘’을 동원할 필요를 느낀 뒤부터였다. 그런데 그 힘은 그야말로 동물적이었다. 1930년대 초, 박력(迫力)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 같은 무렵, 추진력이라는 말도 사람에게 쓰이기 시작했다.

밀어붙이는 힘이라는 뜻의 두 단어는 본래 소나 말 같은 가축에게나 어울렸다. 그러나 ‘명령에 따라 물불을 가리지 않고 진격하는 보병형 인간’을 원했던 일본 군국주의는 이 말에 ‘남성성을 대표하는 우월한 가치’를 부여했다.

해방 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군인의 덕목인 ‘힘’의 가치는 한층 더 높아졌다. 뒤이어 1960년대에 군사작전과 같은 방식으로 개발하고 건설하는 ‘돌격건설의 시대’가 열렸고, 그 과정에서 ‘힘’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단일 요소로 자리 잡았다. 경쟁력, 지도력, 매력, 친화력, 지력, 경제력, 창의력, 사고력, 이해력, 논리력, 판단력 등 온갖 것들, 심지어 힘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에까지 ‘힘’이라는 글자가 들러붙었다. 생각을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한글이 힘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반면 사랑, 배려, 연민, 도덕, 염치, 기개, 지조, 양심, 정의 같은 단어들에는 ‘력’자를 붙이지 않는다. 힘 숭배의 시대에 이런 것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정의의 보루여야 할 사법부가 ‘집단권력’을 키우기 위해 불의한 짓을 했다. 이런 일이 전임 대법원장 한 사람의 일탈로 벌어질 수는 없다. 법관 다수가, 현대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정의와 도덕, 양심보다 기득권력을 중시한 때문일 터이다. 이미 많은 힘을 가진 사람들이 더 가지려고 자기 존재 이유조차 부정하는 모습이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몸에 힘을 비축하려면 계속 힘을 들이는 수밖에 없다. 힘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평생 힘들게 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힘듦’, 즉 ‘힘들임’은 현대인이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필연적으로 힘 가진 자들의 횡포와 힘없는 자들의 절규를 일상 풍경으로 만든다. 우리가 힘을 숭배하는 종교적 열정을 줄이고 힘으로 표현되지 않는 것들의 가치를 소생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문명의 전환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힘 드는 삶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