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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송두율 칼럼]꿈의 해석

opinionX 2018. 6. 5. 11:31

꿈은 우리 삶의 동반자다. 동시에 꿈은 ‘꿈에 보인다’라는 말처럼 시각적인 의미와 관련되어있다. 꿈을 뜻하는 한자 몽(夢)의 어원도 ‘눈이 어둡다’거나 ‘앞이 안보인다’는 것을 형상화했다. 뿐만 아니라 ‘꿈을 꾼다’는 단어가 프랑스어(songer)와 스페인어(sonar)와 같은 라틴계언어에서는 물론 독일어(traumen)와 영어(dream)도 모두 시각적 의미를 띤 어원과 연관되어 있다. 꿈은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잠과 함께 찾아와 어둠을 뚫고 나타나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미래상’(vision)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꿈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좇다보면 우리는 으레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만나게 된다. 그는 무의식의 심연에 놓여있는 꿈의 기능을 유년기의 성적인 억압을 중심으로 해석, 꿈은 억제된 본능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와 달리 카를 구스타프 융은 꿈은 자기검열로 인해 굴절된 표현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려는 적극적인 상징표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꿈이 단지 개인적인 무의식의 비밀스러운 기록이 아니라 그가 속한 종족이나 집단이 지향했던 어떤 ‘원형적’인 모습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963년 8월28일, 워싱턴에서 행한 ‘나에게는 꿈이 있다’라는 명연설은 인종주의적인 멸시와 차별, 그리고 가난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흑인들이 바라는 새로운 미국에 대한 원초적인 꿈을 담았다.

절대왕정이 지배했던 구대륙 유럽을 뒤로한 청교도들이 신세계에 건너와 자연법에 기초한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추구’의 권리를 강조한 ‘미국독립선언’이 바로 그러한 꿈의 내용이었다. ‘접시닦이에서 백만장자’라는 말로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아메리칸드림’은 그 후 작가이자 역사가인 제임스 트러스로 애덤스가 미대륙을 여행하면서 남긴 <미국의 서사시>에 처음 등장하였다. 이로부터 자유, 책임, 경쟁, 기회균등, 노력에 따르는 보상 등이 지금 우리가 통속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아메리칸드림의 내용이 되었다. 뉴욕타임스가 1996년 이래 매년 실시하는 여론조사에 의하면 이 같은 아메리칸드림을 믿는 미국인이 비율이 여전히 60~80%를 차지한다. 이런 주관적인 평가에 대해서 놈 촘스키는 <아메리칸드림을 위한 진혼곡>에서 1990년대부터 신자유주의의 광풍으로 인한 민주주의의 후퇴 때문에 미국적 꿈의 핵심이었던 계층이동이 유럽보다 더 힘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아메리칸드림의 최근 모습을 염두에 둔 제러미 리프킨은 그의 저서 <유럽의 꿈>에서 유럽의 꿈을 불안한 이 시대의 지평에 보이는 한 줄기의 빛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유럽의 꿈을 아메리칸드림과 비교하면서 포용성, 다양성, 삶의 질, 복지, 지속가능성, 보편적 인권, 자연과 평화를 유럽적 꿈의 내용으로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28개 나라 안에 5억명이 넘는 인구가 ‘유럽연합’이라는 한 지붕 밑에서 평화롭게 함께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2010년 이후 그리스가 심각한 재정위기에 빠지면서 이 문제의 해결을 둘러싼 연합 내의 의견충돌은 유럽의 꿈이 과연 실현가능한 기획인지에 대한 회의도 점증시켰다. 게다가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영국은 2016년 6월 유럽연합에서 탈퇴를 결정, 위기감은 고조되었다.

‘유럽합중국’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보수적인 주장은 늘 있어왔다. 또 최근의 위기와 관련, 유럽연합은 통합보다는 현재 존재하고 있는 차이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작년 12월에 실시된 ‘유럽위원회’의 여론조사는 전체 유럽연합 성원국 국민의 절반 정도가 유럽연합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비판과 회의적 시각에 대해서 하버마스는 <유럽헌법에 대하여>라는 저서에서 유럽통합을 단지 경제적 관점에서만 보고, 통합의 정치적 차원과 유럽헌법이라는 민주적 법제화를 뒷받침하는 문명사적인 힘을 경시하는 단견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다양성의 통일이라는 유럽의 큰 꿈이 이렇게 흔들리면서 유럽연합의 중심부인 독일과 프랑스 같은 부자나라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들이 희생되고 있다고 여기는 주변부의 저항도 거세지고 있다. 이와 함께 유럽연합의 약한 고리인 그리스나 포르투갈과 같은 지중해연안국가와 냉전체제의 해체 이후 유럽연합에 합류한 동유럽국가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새로운 세력이 나타났다.

과거의 ‘비단 길’을 따라 ‘일대일로(一帶一路)’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구상을 하고 있는 중국이 바로 그 세력이다. 2013년 3월, ‘전인대(全人代)’의 폐막연설에서 시진핑이 수차례 언급한 ‘중국몽(中國夢)’은 지구화의 중심에 중국이 자리 잡겠다는 원대한 구상이다. 아메리칸드림이 개인의 행복, 유럽의 꿈이 다양성의 통일을 강조하는 반면에 중국몽은 개인생활의 풍족(小康)도 이야기하지만 주안점은 역시 지구적 패권국가의 건설에 있다. 오랜 빈곤과 근세에 들어와서 겪었던 민족적 멸시가 만든 집단적 기억이 바로 그러한 꿈을 정당화하고 있다. 물론 이 꿈의 실현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많다. 특히 ‘현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심한 빈부격차, 부정부패와 환경오염 문제는 큰 꿈을 향하는 동력을 많이 제약하고 있다.

지금까지 언급된 세 가지 꿈은 그러나 모두 다 대륙의 꿈이다. 그렇다면 작은 나라들의 꿈은 불가능한 이야기인가. 최근 볼리비아와 에콰도르는 서양의 자본주의적 가치에 대하여 원주민의 공동체적 생활양식을 지향하는 ‘좋은 삶’(buen vivir)을 헌법조항에 삽입, 그들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꿈은 무엇인가? ‘코리안드림’은 아메리칸드림의 축소판인가? 한반도는 중국몽과 함께하는 작은 이웃에 불과한가? 다양성의 통일이라는 유럽의 꿈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많은 질문이 꼬리를 문다.

김구 선생은 이미 70여년 전에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화두를 던졌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우리는 지금 이 화두가 담고 있는 의미를 곱씹어야 한다. 남북이 함께 분단의 아픔을 이겨내면서 평화와 번영을 가꿀 수 있는 한반도는 단지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록 패권의 꿈을 키울 수 있는 대륙은 아니지만 높은 문화를 지닌 한반도가 ‘작은 거인’으로서 새로운 꿈길로 세계를 인도할 수 있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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