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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직설]번아웃의 반대말

opinionX 2018. 6. 5. 11:27

한 친구와 오랜만에 만났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 알게 됐고 2학년 2학기부터 졸업할 때까지 기숙사 생활을 함께했다. 서로 다른 대학에 입학했지만, 시간을 내서 한 달에 두 번쯤 만나 술잔을 기울였다. 졸업 학기가 되자 그 횟수는 몰라보게 줄어들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한 달에 한 번은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한 달이 한 계절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둘 다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만남의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가끔 통화를 하고 그보다는 자주 문자를 주고받았지만, 몇 날 몇 시에 어디서 만나자는 말은 섣불리 하지 못했다. 약속을 하면 기다렸다는 듯 우리 둘 중 누군가에게 불똥이 떨어졌다. 야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급하게 지방으로 조문을 가야 하는 상황 등 들어보면 다음을 기약하는 것밖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우리에게는 늘 사연이 있었다. 바쁘다고, 숨통이 좀 트이면 만나자고, 상사 대신 출장을 가게 되었다고, 잊고 있던 원고의 마감이 오늘까지라고, 잘 보여야 하는 거래처 직원이 갑자기 저녁을 먹자고 했다고…. 그럴 때면 우리는 말했다. 나중에 보자. 정작 나중이 되자 연락을 하지 못했다. 한창 바쁠 때인데 방해가 될까 봐, 쉬는 중인데 내가 리듬을 깰까 봐, 아직 나중이 되지 않았을까 봐. 친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느 날 밤, 사전을 펼쳐 ‘나중’의 뜻을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나중의 뜻 가운데는 이런 것도 있었다. “순서상이나 시간상의 맨 끝.” 친구를 만나는 일이 인생의 우선순위에서 맨 끝에 가는 것만큼 우울한 일은 없을 것이다. 나중을 마냥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나중이 찾아왔을 때 친구가 내 곁에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꼭 보자. 나중 말고 오늘.

1년 만에 만난 친구는 피로해 보였다. 친구 눈에도 내가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웃으면서 인사하고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음료를 주문하고 마주 앉았다. 잘 지냈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 질문이 튀어나왔다. 우리는 둘 다 “잘 지냈어?”라고 묻지 않고 “잘 지냈지?”라고 물었다. 잘 지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서, 상대가 잘 지냈다고 대답해주길 바라서 확인하듯 물었을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눈치를 보다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서로 웃음이 터졌다. “우리 둘 다 잘 지내지 못했나 보다.” 친구의 말을 듣고 있으니 그간 소원했던 날들이 다 무색해지는 느낌이었다. “나중만 찾다가는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 내 말에 친구가 환히 웃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내 주위를, 무엇보다 나를 제대로 못 챙긴 것 같아.” “나도 마찬가지야. 그렇다고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내 말이!”

카페에서의 시간은 유유히 흘렀다.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단 한 번도 전화기를 체크하지 않았다. 친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하기 싫더라고. 내가 여기에 왜 있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나중을 위해서 열심히 뛰어야 한다고 하는데, 대체 그 나중은 언제 오는 거지? 일도 재미가 없고, 도통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러다 우연히 번아웃 증후군에 대한 글을 읽고, 읽자마자 무릎을 탁 쳤다.”

친구는 소진되어 있었다. 내 처지도 다를 바 없어서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커피와 함께 주문한 쿠키를 하나 건넸을 뿐이다. “번아웃의 반대말은 뭘까?” 쿠키를 먹으며 친구가 물었다. “글쎄, 다시 시작하는 걸까?” “나는 지금 같아. 번아웃은 어떤 시기가 지나고 나서의 일이잖아. 나중이 되어서야 후회하는 거지.” “그래서 우리가 지금 만난 거잖아!”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는 아이를 잃은 부부에게 갓 구워낸 빵을 건네는 빵집 주인이 등장한다. 힘들고 바쁜 때일수록 갓 구워낸 빵이 필요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어떤 것이. 친구와의 만남도 이와 같을 것이다. 곁에 있는 존재들을 맨 끝에서 마주하는 것이 아닌, 지금 내 앞으로 끌어당기는 것.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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