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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최초의 근대적 통상조약이 체결된 뒤, 청국은 조선에서 일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구미 각국과도 통상관계를 맺으라고 권고했다. 이에 따라 조선이 처음 교섭을 시작한 나라는 공교롭게도 미국이었다. 미국과는 이미 1871년 신미양요 때 한 차례 무력충돌을 겪은 일이 있었으나, 아는 정보는 극히 적었다. 모르는 상대와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을 수는 없는 일. 조선 정부는 여러 경로로 미국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고, 그 나라에는 ‘임금’이 없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유교 통치이념밖에는 모르던 조선왕조 지배층에게 미국의 민주공화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제도였다. “미리견(米利堅)에서는 백성들이 경륜과 덕망이 있는 사람을 추대하여 추장으로 삼는데, 추장은 몇 년마다 한 번씩 바뀐다”는 말을 들은 왕과 관료들은 오랑캐가 도리를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들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조선인의 국가관과 정치관은 미국인과 정반대였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유교 정치관에 따르면, 군주는 하늘을 대리하여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자로서 오직 하늘만이 그를 임면할 권리를 가졌다. 나라는 군주의 땅이었고, 신민은 군주의 종복이었다. 군신 관계는 부자, 부부관계와 더불어 인간세상의 삼대 벼리, 즉 삼강(三綱) 중 하나로서 결코 뒤바뀌어서는 안 되는 관계였다. 그런데 군주를 하늘이 아니라 백성들이 선출하다니. 이는 자식이 부모를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역무도한 일이었다. 당장 하늘의 이치를 거슬러 통치권을 행사하는 자를 부를 마땅한 호칭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천리(天理)를 모르는 야만족의 족장에 해당하는 ‘추장’이라는 호칭을 썼고, 조약문에는 ‘president’의 발음을 따서 ‘백리새천덕(伯理璽天德)’이라고 썼다.
대통령이라는 직함은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의 무력시위를 겪은 뒤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본래 ‘통령’이란 중세 동아시아 3국에서 중급 단위 부대의 지휘관에게 붙이던 칭호였다. 일본인들은 그 앞에 ‘대’자 하나만 붙임으로써 나름 예우의 뜻을 담았으나, 그래 봤자 폐하 전하 합하 아래의 각하였다. 대통령이라는 호칭은 조사시찰단을 통해 국내에 알려졌고, 고종은 1884년에 이 칭호를 처음 사용했다. 그러나 추장에서 대통령으로 호칭을 격상시켰다고 해서 민주공화제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지는 않았다.
1899년 대한제국 헌법에 해당하는 ‘대한국국제’가 공포되었다. “제1조 대한국은 세계만국의 공인되온바 자주독립하온 제국이니라.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부터 500년간 전래하시고 이후로 항만세(恒萬歲)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로 시작한 이 국제의 모든 조항은 황제의 권리만 규정하고 의무는 규정하지 않았다. 인민에게는 오직 ‘군권(君權)을 침손하지 않을 의무’만이 부과되었다. 속마음이 어땠는지는 모르나, 당시 개화파 인사들도 이 국제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이 땅에서 민주주의와 공화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고종이 강제양위당하고 정부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이 임명되는 등 대한제국이 사실상의 식민지로 전락한 1907년께부터였다. 군주가 하늘을 대리하여 백성을 다스린다고 보는 전래의 정치관으로는, 망국 이후의 사태에 대처할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일본의 강제병합 이후 10년 가까이, 절대다수 사람들은 독립할 희망조차 갖지 못했다. 독립 이후 누가 주권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 자체가 없었다. 심지어 ‘세계개조의 대기운’에 힘입어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독립하면 누가 임금이 되는가?”라고 물었을 정도였다.
3·1운동으로 독립을 선언한 뒤, 절대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은 새 나라가 ‘민주공화제’를 채택해야 한다는 데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국호는 대한민국이 되었고, 그 수반은 집정관총재, 국무총리, 대통령 등의 호칭을 얻었다. 그러나 대다수 대중은 민주주의라는 개념조차 알지 못했다. 그들의 삶을 속박한 것은 천황제 절대주의였고, 일본 왕은 동양 전래의 군주나 황제를 넘어 ‘사람의 모습을 취한 신’으로 섬겨야 하는 대상이었다.
해방을 맞아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공식화했지만, 다수 대중에게 민주주의는 여전히 낯선 개념이었다. 해방 직후에는 ‘민주’라는 단어가 ‘관리들의 친절한 복무태도’와 얼추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에는 민주주의가 뜬금없이 공산주의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 때문에 이승만의 중세적 전제정치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수 있었다. 헌법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천명했어도, 많은 사람들이 ‘문서상의 주권’을 고무신 한 켤레나 막걸리 한 사발의 가치만도 못한 것으로 생각했다. ‘대통령이 생존하는 한 불변할 전제권’을 명문화한 유신헌법에조차도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황당한 이름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정치의식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7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민주주의의 ‘압축성장’을 경험했기에,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민주주의는 같은 의미가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심지어는 정반대되는 생각들이, 민주주의라는 단일 개념 안에서 공존하며 상쟁한다. 이번 대통령 탄핵은,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원칙을 확인함으로써, 이 다른 생각들이 통합될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주권자는 국민이며, 그 주권을 위임받은 자가 국민 다수의 신임을 배반할 때는 언제든지 파면할 수 있다는 것. 이 원칙에 대한 동의 기반을 확대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적 국민통합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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