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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금, 나직이 불러보면 시골 초등학교 동창생 가시내 이름 같기도 하고 다시 정금, 중얼거리면 입에 침이 가득 고인다. 박수근 그림의 바탕이 되는 회백색의 질감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흔한 무른 바위의 거친 표면을 아주 닮았다. 어릴 적 고향 뒷동산에서 뛰놀 때 부드럽게 휘어진 능선을 돌아들면 굵은 소금 같은 알갱이로 부서지는 다정한 바위들. 그 가까이에 주로 자라는 나무가 있었다. 정금나무였다.

소 먹이러 갔을 때 후두둑 깜보랏빛으로 익은 열매는 늘 우리들 차지. 정금나무의 키는 내 머리통에 수박 하나를 얹은 것과 어금버금해서 겨드랑이에서 팔을 쭉 빼면 딱 따먹기 좋은 위치였다. 어느 땐 익기를 기다리지 못해 초록의 띵띵한 열매를 훑기도 했다. 깨물면 퍼지는 시금털털한 맛도 얼굴 한번 찡그리고 나면 뒷맛이 이내 좋았다.

경상남도와 전라북도를 하나로 꿰매는 육십령에서 출발해 덕유산에 올랐다. 한식이나 벌초하러 오고 갈 때마다 별렀던 산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땀을 쏟고 능선에 올라 산세를 거머쥐고부터는 자주 오른쪽을 보았다. 농도를 달리하여 배열되는 산 너머너머에 내 고향이 숨어 있는 것이다. 덕유, 조용히 부르면 집에서 통하는 이름이 덕순이었던 친척 누이가 생각나고 덕유, 다시 부르면 덕이 여유롭게 흘러넘치던 동네가 떠오른다. 그리고 한번 더 덕유, 중얼거리면 이 모두를 다 품는 저 후덕한 덕유산!

할미봉을 지나 어느 바위틈을 돌아들자 붉게 상기된 듯한 나무가 있었다. 정금나무였다. 귀밑머리 솜털처럼 잎에는 잔털이 송송하고 가장자리엔 핏빛이 감돈다. 열매만 탐했던 터에 이제야 비로소 꽃들도 눈으로 들어온다. 소 턱 밑의 작은 워낭처럼 아래를 향해 달려 있는 꽃. 톡 건드리면 딸랑딸랑 워낭소리가 울려나오고 그 소리 끝을 따라가면 내 잃어버린 것들이 딸려 나올 것 같은 정금나무의 정다운 꽃, 꽃, 꽃, 꽃, 꽃. 진달래과의 낙엽 관목.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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