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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기억을 뒤적이면 그 내용을 다 발굴할 순 없어도 희미한 얼개는 간신히 수습할 수 있다. 바다로 나간 뒤 돌아와야 할 이를 기다리고 기다리다 주인공은 죽고, 그 자리에서 자라나 붉은 꽃을 피웠다는 전설 속의 나무. 이미자의 노래보다 먼저 동화에서 그 나무를 알았다.

휴일이 없는 달력이라면 누가 가까이 걸어놓겠는가. 하루가 짬뽕 국물처럼 빨갛게 표시된 날이면 짬을 내어 야외로 간다. 지난주 강원도 양양의 어느 석호(潟湖)에서 사초과 식물을 관찰했다. 화려하지도, 드러나지도 않으면서 지표의 한 면을 담당하는 흔한 풀들. 세상의 마무리가 이리도 오밀조밀하고 정교하다. 큰고랭이, 민하늘지기, 진퍼리사초, 병아리방동사니, 세대가리, 통보리사초 등등. 부르기도 힘들지만 구별하기는 더욱 힘든 사초과 식물들 사이에서 그 나무를 만났다. 먼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내 키만 한 해당화였다.

저녁 시간. 사람이 먹는 밥은 사초과와 이웃한 벼과 출신의 식물이다. 사초과가 없었더라도 벼가 우리 곁에 있을 수 있었을까. 주최 측에서 마련한 메뉴는 은어튀김에 뚜거리탕. 잘 차려진 음식 중에서도 오늘은 특히 고슬고슬한 공기밥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야물게 씹어먹었다.

시간은 늘 제 속도로 흐르는데 그 빠르기는 시간 속에 담긴 각자의 몫이다. 꼬박꼬박 끼니를 챙기며 하루를 더 있다가 서울로 왔다. 아무리 망각하려고 해도 달력에 있는 모든 날들은 반드시 오고야 마는 법이다. 그사이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서 순례하는 분은 아직 도로 위에 있었고 세월호 참사 100일을 맞았다. 그날 아침 신문의 한 대목 앞에서 밥알이 잘 넘어가지를 아니했다. “오늘도 한번 신나게 굶어보자.” 열흘째 광화문에서 곡기를 끊고 계시는 ‘아버지’의 한마디가 내 혓바닥을 찔렀기 때문이다. 땡볕의 도심에서 먼바다를 헤아리며 휘청거리고 있는 아버지들. 어뢰 같은 열매가 달리고 잎과 줄기에 가시가 돋는 해당화 같은. 장미과의 낙엽 관목.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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