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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과 지방선거에서 2연패한 민주당에서는 친문계와 친명계의 책임 공방이 살벌하다. 제도적으로는 당대표 선출 시 현재 대의원 45%, 권리당원 40%로 규정된 반영 비율을 각각 20%와 45%로 조정할 것인가가 뜨거운 쟁점이다. 대의원은 친문계가, 권리당원은 대선과 지방선거를 치르며 유입된 강성 지지층이 두꺼운 친명계가 더 유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리당원 반영 비율을 높이자는 쪽의 주장은 당비를 내는 권리당원이 당의 주인인데 지금의 제도하에서는 이들의 더 많은 지지를 받아도 대의원 지지를 못 받으면 낙선할 수 있어서 비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하고 다른 나라의 제도와 비교해보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우선 떠오르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당비를 낸 권리당원의 뜻대로 결정되어야 한다면 정당과 주식회사의 차이는 무엇인가? 혹은 전당대회와 주주총회의 차이는 무엇인가? 주식회사에서는 지분을 소유한 만큼, 그러니까 돈을 낸 만큼 의결권을 가지는 것이 맞다. 돈을 내지 않은 외부인의 개입을 허용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정당도 그런가? 주식회사에는 십원 한 장 공짜로 생기는 것이 없다. 개인 투자자든 벤처 캐피털이든 뭐든 간에 주식회사에 돈을 줄 때는 나중에 훨씬 더 큰 이익으로 돌려받으려는 투자이지 공짜는 없다. 정당도 그런가? 그럼 정당 보조금은 왜 받나? 당장 이번 대선에 들어간 비용만 해도 5개 정당이 무려 465억원이나 보조받았고, 그중 민주당 몫이 절반에 가까운 224억원이다. 여기에 수백억대에 이르는 경상보조금까지 더하면 거대 정당에는 돈이 넘쳐흐르는데, 그건 전부 그 정당과 무관한 일반 국민들의 세금이다. 그러니 당비를 낸 권리당원이 당의 주인이고 그들의 의지가 관철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밀고 나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러면 권리당원 반영 비율을 낮추고 대의원 비율을 높이는 것이 정답인가? 그렇지도 않다. 권리당원 비율을 높이면 목소리 큰 강경파의 힘이 과도하게 커지고, 대의원 비율을 높이면 조직을 장악한 기득권의 힘이 너무 커진다. 각각 몇 %라는 정답을 찾는 건 어차피 불가능하다. 핵심은 ‘수치’가 아니라 ‘방향’을 찾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필터’가 필요하다. 미국 민주당을 예로 들면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주별 대의원 수 할당은 복잡한 공식을 거쳐야 하지만 기본이 되는 것은 지나간 세 번의 대선에서 각각의 주가 민주당 후보에게 몇 %의 표를 주었느냐는 것이다. 지지율이 높았던 지역일수록 더 많은 대의원 수를 할당받는다. 정당이 지지층의 의사를 더 많이 반영하겠다는 것은 권리당원의 뜻을 반영하겠다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라서 이를 비난할 이유는 없다.
한국 민주당이 권리당원 반영률을 몇 %로 하든 그 구성은 지난 몇 번의 대선에서 민주당에 투표한 지지층의 인구구성에 맞추겠다고 한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대안이 될 것이다. 대선 투표에 대한 상세한 자료도 나와 있고 층화표집을 위한 기법도 충분히 발달해 있으니 의지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처럼 무턱대고 투표한다면 지난 몇 달간 유입된 강성 지지층이 과다대표될 것은 뻔한 일이고 이것은 특정 후보에 압도적으로 유리할 뿐 아니라 문재인 정부 5년 내내 극단적 소수에 휘둘려 중도층을 쫓아낸 과오를 반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지지층의 인구구성에 맞추는 식의 ‘필터’를 집어넣는 것은 포퓰리즘을 잠재우고 정책정당과 합의정치를 지향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지금처럼 당원의 극단적 요구와 국민의 중도적 요구를 함께 충족시켜야 하는 후보는 포퓰리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경우 바로직전 대선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세 번의 대선에서의 지지율을 함께 고려함으로써 시기적으로 불거지는 극단주의를 중화시킨다. 거기에다 대선 선거인단이 결정되고 나면 그들은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 중 적어도 한 사람은 자신의 지역 출신이 아닌 사람에게만 투표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지역주의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중화시킨다. 내각제와 합의제 민주주의가 대통령제와 다수제 민주주의보다 낫다는 주장이 많지만, 다수제 민주주의하에서도 극단적 주장을 완화시키고 합의정치의 방향을 지향할 수 있는 방법들은 존재한다. 몇 %냐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패배를 계기로 정치의 정상화를 위한 제도를 설치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당이 주식회사와 다른 이유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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