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정치 칼럼/장덕진 칼럼

지정학의 힘

opinionX 2022. 7. 19. 10:53

문재인 전 대통령이 현 정부 인사들에게 <지정학의 힘>이라는 책의 일독을 권했다고 한다. 이 보도를 접하면서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하필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귀순 어민 강제 북송 사건이 불거진 상황이어서 여러 해석이 따라붙는다. 지금 문 전 대통령의 의도가 무엇이든, 나는 그가 재임 시절 지정학을 진지하게 고민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가 세계에서 가장 예측 불가능한 두 명의 정치지도자인 트럼프와 김정은을 한자리에 모으고 평양 능라도 5·1종합경기장에 모인 15만 군중 앞에서 연설했을 때, 국민의 3분의 2가 그를 지지했고 과반수가 북한의 약속 이행을 믿는다고 여론조사에서 답했다. 불과 4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 그 후에 벌어진 일의 책임을 전적으로 그에게만 돌리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하지만 허무하게 끝난 하노이 회담 이후 그의 임기 말까지 한국의 선택은 적어도 지정학이라는 관점에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미국도 북한도 동의하지 않는 상태에서 한반도 평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지정학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했을까.

마침 아베 전 일본 총리가 불의의 피습으로 세상을 떠난 일은 이 생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한국에서 그의 이미지는 ‘극우’라는 한 단어로 모아지는 듯하고, 실제로 그의 조부에서부터 시작된 이웃 나라들과의 악연, 일본 총리로서 그가 했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비롯한 일련의 발언과 행동들, 수출규제를 통해 한국 경제의 십자인대 파열을 노렸던 비겁한 공격,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려는 부단한 노력 등은 극우라는 평가에 진실의 한 면이 담겼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막상 그가 세상을 떠나자 대다수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를 넘어 진심으로 그를 애도했고, 그가 남긴 지정학적 유산은 앞으로 오랜 시간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아베가 인도 의회에서 그 유명한 “두 대양의 합류” 연설을 했던 2007년과 2기 집권을 앞둔 2012년 발표한 “아시아의 민주주의 안보 다이아몬드” 발언 이후로 ‘아시아·태평양’은 용도 폐기되고 세계는 ‘인도·태평양’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인도·태평양 전략의 중심축인 쿼드는 한국을 제외한 미국, 일본, 호주, 인도 4개국이 중심이 되어 중국과의 대결을 준비한다. 중국 시장과 대북 영향력을 염려한 한국은 여기에 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코로나19가 인류를 강타하고 트럼프 대통령은 WHO를 탈퇴하는 등 미국이 민주주의 세계의 지도력을 일정 부분 잃어버렸을 때 아베는 미국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대체하며 인도·태평양을 세계에 전파했다.

이제 세계는 아베가 창조한 단어인 인도·태평양을 통해 지정학을 이해하고 있다. 과거 아시아·태평양이 지정학의 핵심 단어였을 때 한국은 이 지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심 국가였다. 하지만 쿼드 4개국이 마치 야구의 홈플레이트와 1·2·3루처럼 안보의 4개 축을 구성한다는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한국의 입지는 한없이 작아 보인다. 문 전 대통령이 미국과 북한의 동의 없이 한반도 평화를 이끌어내는 지정학을 고민하고 있을 때 아베는 10년을 훌쩍 넘는 긴 시간 동안 세계 176개 국가를 방문하며 지정학의 틀 자체를 바꿔버렸다. 문 전 대통령의 고민은 아베가 했던 고민의 종속변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2021년 12월 문 전 대통령이 호주를 국빈방문했을 때 호주 언론은 한국이 드디어 호주를 비롯한 쿼드와 비슷한 관점에서 지정학을 바라보기 시작했는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한국을 잘 아는 호주의 전문가는 단숨에 이렇게 말했다. 방문의 목적은 한화그룹의 무기 수출과 호주의 천연자원일 뿐, 전략적 의미는 전혀 없다고. 아베가 세상을 떠났을 때 토니 애벗 전 호주 총리는 “아시아의 최고의 친구를 잃었다”고 애도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여기에 또 고민을 더한다. 러시아와 중국이 다시 가까워지고 북한은 여기서 기회를 포착한다. 끝난 줄 알았던 냉전이 끝나지 않았다. 과거 냉전시대와 다를 바 없이 세계가 두 개의 블록으로 첨예하게 갈라지는 신냉전의 시대가 돌아오고 한국이 또 한 번 물리적 충돌의 장이 되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의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지정학의 힘이 국가의 명운을 바꾸는 시기로 접어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정학에 대한 고민에서 나오는 전략은 전임 대통령보다 훨씬 웅장하고 치밀해야 할 것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