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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엑시트'의 한 장면. CJ ENM 제공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기발한 상상력의 산물로만 여겼다. 쓰레기봉지로 만든 방호복 말이다. 지난해 여름 재난탈출액션을 표방하며 개봉한 <엑시트>에서 유독가스로 뒤덮인 도심을 탈출하기 위해 주인공 조정석과 임윤아는 쓰레기봉지로 온몸을 싸맸다. 영화에서 코믹적 요소였을 ‘쓰레기봉지 방호복’이 현실에서, 그것도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서 코로나19에 맞서는 의료진의 동아줄이 될 것이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했다. 미국에서는 방호복이 없어 쓰레기봉지를 뒤집어쓰고 일하던 간호사가 사망하기도 했다.
근대 이후 줄곧 선망의 대상이던 선진국들이 코로나19에 우왕좌왕하는 사이 드라이브 스루 진료소 등 한국의 방역 모델을 외신들이 앞다퉈 보도했다. 한국의 프로야구가 미국 TV에 생중계되고, 국내 기업의 진단키트가 120여개국에 수출된다는 뉴스도 나왔다.
그렇게 ‘코로나발(發) 국뽕’ 분위기가 달아오를 즈음 ‘이천 물류센터 화재’ 사고가 터졌다. 38명의 노동자가 한꺼번에 죽었다. 후진적 사고의 전형이다. 공사 기간 단축을 위해 안전수칙은 무시됐고, 값싸다는 이유로 사고에 취약한 건설자재를 사용했다. 2008년 40명이 숨진 이천 냉동창고 사고와 판박이였다. 희생자 대부분은 일용직 노동자였다.
코로나19 방역 성공적이지만
우리의 현실은 과거와 비교해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
민주당은 덩치 커진 것 빼고는
코로나 이전과 대동소이하다
코로나19 방역 성공에 가려졌던 한국의 민낯이 드러났다. 우리의 현실은 과거와 비교해 그다지 변한 게 없었다. 사람보다는 이윤이 먼저였다. 아파트 경비원은 ‘갑질’ 피해를 호소하며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돈도 힘도 없는 노동자들의 죽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또 잊혀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김광규 시 ‘안개의 나라’ 중)
비극은 우리 가까이서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었다. 코로나19 창궐 이전에도 일자리는 줄어들고 성장동력은 약해졌다. 소득계층 간 불평등은 심해졌고, 집값은 미친 듯이 뛰었다. 코로나19는 그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가혹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임시·일용직이 많은 1분위 가구(소득 하위 20%)는 올해 1~3월 유일하게 소득이 감소한 계층이다.
고단하고 궁색한 현실이지만 민주당은 지난 4·15 총선에서 177석의 승리를 거머쥐었다. 시민들이 ‘극난 극복’을 앞세운 여당에 힘을 모아준 것이다. 여기에는 해외에서 호평받은 코로나19 방역 활동이 기반이 됐다. 실제로 총선을 앞두고서도 정부가 투명한 방역 활동을 뚜벅뚜벅 수행한 것은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총선 후 민주당이 보여주는 모습은 민심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덩치가 커진 것 빼고는 코로나 이전과 이후가 대동소이하다. 승리의 나팔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오거돈 부산시장은 집무실에서 직원을 성추행해 ‘사퇴당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사건이 불거진 게 불과 2년 전이다. 후보자를 공천할 때 ‘실거주용 1주택 보유’라는 자격 기준을 적용하기로 했지만, 민주당과 그 위성정당에서는 4년 만에 재산이 44억원 늘어난 비례대표 후보자의 부동산실명제 위반과 명의신탁 의혹을 검증하지 못했다.
최근에는 회계처리 부실, 힐링센터 고가 매입 등 윤미향 당선인에 대한 논란이 뜨거운데도 민주당은 사실상 수수방관하고 있다. 이용수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두 번씩이나 열어 문제를 제기했어도 검찰 수사 결과를 지켜본다는 게 공식 입장이다. 내 숙제를 남이 해주길 바라며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제도적으로는 어떤가. 2016년 서울 ‘구의역 참사’,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 사망 사고에도 ‘2인1조 근무’는 정착되지 못했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에 이 같은 내용이 빠졌기 때문이다. 집값 안정을 위해 정부가 지난해 내놓은 ‘12·16 부동산 대책’의 핵심인 종합부동산세 강화는 여전히 입법화하지 못했다.
위에서 인용한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민주당은 시민과 여론을 경청해 정책의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동안 미뤄졌던 과제들을 매듭짓는 정치력을 보여줘야 한다. 안개를 몰아내줄 것으로 기대한 거대여당이 벌써부터 제대로 듣지 못할까 우려되는 현실이 씁쓸하다.
<박재현 미디어전략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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