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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출판평론가 표정훈씨가 유길준 <서유견문>의 ‘서(西)’를 ‘서(書)’로 바꾸어 ‘서유견문(書遊見聞)’을 하자고 썼던 글을 기억한다. 그가 말한 ‘서유’란 바로 책을 찾아 떠나는 서점기행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 김언호 한길사 대표가 <세계서점기행>을 낸 뒤, 중국 서점기행을 떠나자고 제안했을 때 솔깃했지만 끝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올해 초 ‘한겨레21’을 들추다가 박현숙 자유기고가가 연재하는 ‘중국 서점기행’을 읽게 됐다. 연재는 윈난성 리장에서 시작해 상하이, 톈진, 쑤저우, 베이징 등 중국 전역을 돌며 이어지고 있다. 20년 넘게 중국에서 살고 있다는 그는 자신의 중국 체험을 녹여내어 특색 있는 서점들을 맛깔나게 소개하고 있다. 지금까지 소개된 베이징의 서점만 해도 대여섯개나 된다. 그의 서점기행을 읽으면서 ‘서유견문’을 떠날 용기를 냈다. 

지난주 베이징 서점기행에는 지인 3명이 동참했다. 대부분 간서치가 아니면 독서인이어서 ‘서유견문’에 손색이 없었다. 설사 ‘서유(書遊)’가 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서쪽으로 여행하는 ‘서유(西遊)’는 확실하니 말이다. 베이징 한복판에 숙소를 잡았다. 구궁 근처, 이육사 시인의 순국지 바로 옆이었다. 육사가 숨을 거둔 옛 일본영사관 감옥 건물은 최근 알려진 것과 달리 여태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까지 주민이 거주했던 주변 공동주택마저 텅 비었다. 철거가 임박했다는 신호다. 

서점 기행은 왕푸징거리의 상무인서관에서 시작됐다. 1897년 상하이에서 창립해 1950년대 베이징으로 옮긴 이곳은 중국 최고의 출판사다. 중국인이 애용하는 <현대한어사전> <신화자전> <사원(辭源)> 등의 사전, <사고전서> <24사> 등의 고서는 모두 상무인서관에서 출간됐다. 본사 건물 2층에 상무인서관의 120년 역사와 간행 서적을 소개하는 역사관이 있다. 옆 건물 함분루(涵芬樓)서점에서는 상무인서관 간행물을 비롯해 중국학 서적을 판매한다. 그 옆에는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중화서국에서 운영하는 찬연서옥(燦然書屋)이 있다. 두 곳 모두 고전연구자들은 놓쳐서는 안될 서점이다. 동행한 지인은 찬연서옥에서 <사기>(10권)를 216위안(약 3만8000원)에 구입했다. 

베이징대와 칭화대를 끼고 있는 만성서원(萬聖書園)은 이름 그대로 책을 통해 1만 명의 성인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베이징대 출신이 문화운동 차원에서 문을 연 이곳은 중국 인문학의 아지트다. 역사, 철학, 문학 분야 25만권이 600㎡의 공간을 빼곡히 채웠다. 서가를 돌아보는 일은 책의 동굴을 탐사하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책방 주인의 안목 덕분에 <김극목집(金克木集)>(8권)처럼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희귀도서를 발견할 수도 있다. 

베이징 복판의 함분루와 찬연서옥, 대학가의 만성서원은 전통에 충실한 서점이라면, 단향공간(單向空間)은 정주하지 못해 떠도는 게릴라 서점이라고 할 수 있다. 2006년 위안밍위안에서 출발한 이 서점은 싼리툰, 화자디 등 베이징의 외곽을 전전했다. 10여년 동안 정치 탄압이나 자본의 힘에 밀려 어려움을 겪었으나 지금은 베이징에 분점 5곳을 둘 정도로 성장했다. 발터 베냐민의 ‘일방통행로’에서 이름을 딴 단향공간은 끊임없이 새로움과 변화를 추구하는 아방가르드 서점이다. 

정보화가 발달한 중국 역시 대세는 온라인서점이다. 일반 서점은 운영이 쉽지 않다. 지난달 싼리툰의 외국어 서점 ‘노서충(老書蟲·책벌레)’이 문을 닫았다. 이달 말에는 단향공간의 아이친하이(愛琴海) 분점이 폐업한다. 끊임없이 변신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한다. 삼련도분(三聯韜奮·싼롄타오펀)과 페이지원(PAGE ONE)은 베이징 서점의 변화를 이끄는 쌍두마차다. 삼련출판이 운영하는 삼련도분은 5년 전 베이징에 처음 ‘24시간 서점’을 개장한 이후 싼리툰점, 칭화대점 등으로 분점을 늘려가고 있다. 서점에 독서모임을 할 수 있는 공간을 갖춰 젊은이들의 문화살롱으로 인기가 높다. 첸먼(前門)거리에 최근 문을 연 페이지원은 매장 규모가 베이징 최대인 데다 24시간 운영으로 단숨에 명소로 떠올랐다. 책을 사지 않아도 3층 매장에서 톈안먼 광장을 내려다보는 것만으로 발품을 팔 가치가 충분하다. 

중국의 서점은 진화 중이다. 과거처럼 관영 신화서점이 서점을 독점하던 시대는 지났다. 여행 상품이 나와도 좋을 만큼 서점이 다채로워지고 있다. 3박4일간의 베이징 ‘서유’는 상큼했다. 그러나 ‘견문’은 유쾌하지 않았다. 왕푸징에서 페이지원을 찾아 톈안먼 광장을 지나면서 공안에게 4번이나 검문을 받아야 했다. 베이징대에서는 안면인식 등록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캠퍼스 진입이 통제됐다.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 공산당은 공안통치를 가속화하고 있다. 시진핑 정부는 심야서점 지원, 농촌도서관 건립 등 출판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재정 지원만으로 서점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서점은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이 표출되는 공간이다. 서점이 성장하려면 사회가 먼저 건강해야 한다. 시민이 억압받고 감시당하는 속에서 책과 서점이 설 자리는 없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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