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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시작이 있었기에 끝이 있다. 당연한 이치다. 해는 떠올랐기에 지고, 달은 차올랐기에 기운다. 새해를 맞이했던 아침이 있었기에 송년의 밤도 온다. 한 해를 보내는 분위기를 돋우는 노래로 ‘올드 랭 사인’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에겐 ‘석별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더 친숙한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은 ‘오랜 옛날부터(old long since)’라는 뜻을 지닌 스코틀랜드 말이라고 한다. 한때 ‘올드 랭 사인’에 애국가 가사를 얹어 부르기도 했기에 한국인에게 ‘올드 랭 사인’ 멜로디는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묘하게도 그 친근한 멜로디를 작곡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스코틀랜드의 시인 로버트 번스가 1788년 어떤 노인이 부르던 노래의 멜로디에 가사를 붙였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올드 랭 사인’의 악보에 작곡가의 이름은 그저 ‘무명씨’라 적혀 있다.

왜 ‘올드 랭 사인’의 작곡가는 ‘무명씨’가 됐을까, 생각해본다. 개인 창작이 아니라 구전을 통한 집단창작인 경우라면 작곡가가 ‘무명씨’가 된 사연은 어느 정도 해명된다. 작곡가의 신분이 낮아 그 이름 따위는 기억할 필요 없다는 구실로 이름이 잊혀졌을 수도 있다. 신분제 이후의 질서에 살고 있는 우리의 현대적 감각으로는 수긍하기 힘들지만, 그 시절은 그랬다고 아쉽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는 이유다. 

‘무명씨’ 되기를 강요했던 신분제 질서가 붕괴된 이후에도 ‘무명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신원을 확인하지 못해 ‘무명씨’로 분류되는 사람은 더 많아졌다. 워싱턴에 있는 엘링턴 국립묘지에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다.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 바닥에는 ‘무명씨’인 군인을 위한 동판이 새겨져 있고 그 곁엔 ‘영원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 런던에선 ‘무명씨’를 웨스트민스터 사원 입구에서 만날 수 있다. 당연히 한국의 국립현충원에도 무명용사의 탑이 있다. 국가는 그 ‘무명씨’를 애국심 고양의 목적으로 쓴다. ‘무명씨’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모스크바의 크렘린 부근에 레닌의 묘지가 있다. 그 묘지 안엔 방부 처리된 레닌의 시신이 전시되어 있다. 문을 열기 전부터 대기하지 않으면 몇 시간 동안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인기 있다. 그 레닌 묘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무명용사 기념비가 있다. 파리처럼 모스크바에서도 무명용사를 위한 ‘영원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 레닌 묘지를 찾는 사람은 많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무명용사 기념비를 그냥 스쳐 지나간다. 그게 유명인과 ‘무명씨’의 차이다. 유명인은 과한 주목 때문에 유명세를 치르고, ‘무명씨’는 이름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땅히 받아야 대접을 받지 못하고 무시된다. 

수원 화성, 자랑스러운 세계문화유산이다. 수원 화성에서 정조와 정약용이라는 유명인의 능력만을 읽어내는 건 식상하다. 수원화성의 축성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축성에 참여한 ‘무명씨’의 이름이 등장하는 부분이다. 이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서울에서 온 최유토리, 강화에서 온 차언노미, 경기도에서 온 이작은쇠, 충청도에서 온 김점복, 강원도에서 온 이큰돌, 황해도에서 온 최큰노미, 광주에서 온 윤점돌, 개성에서 온 원뮌노미, 전라도에서 온 신고장쇠, 경상도에서 온 엄강아지를 알고 있는가? 수원화성 축성에 목수로, 미장장이로 혹은 석공이나 와벽장이로 참가한 이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보면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궁금해진다. 최유토리, 차언노미, 이작은쇠, 김점복, 이큰돌, 최큰노미, 윤점돌, 원뮌노미, 신고장쇠 그리고 엄강아지의 후손은 또 어떤 ‘무명씨’로 살고 있는가? 

군터 뎀니히라는 독일 예술가는 나치 희생자에게 이름을 되돌려주는 ‘발부리 아래의 돌(Stolperstein)’ 프로젝트로 유명하다. 그는 나치의 희생자로만 알려진 ‘무명씨’가 살았던 주거 현장 길바닥에 작은 명패를 부착한다. 그 명패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기에 ○○○씨가 살았었다(Hier wohnte…).” 나치 희생자라고 에둘러 말해지던 ‘무명씨’가 구체적 삶을 살았던 구체적 인간이었음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예술작업이다.

그의 프로젝트처럼 국민 혹은 시민 때로는 소비자라는 추상적 기호로 대충 말해지고 마는 동시대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우리 시대의 수많은 ‘무명씨’의 삶을 찾고 기록하는 것이 사회학적 글쓰기의 목표라 생각했다. ‘무명씨’가 살아내고 있는 삶의 단편을 이어 하나의 조각보를 구성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윤곽을 스케치하고 싶었다. 물론 그 뜻에 비해 이룬 성과는 보잘것없다. 그래도 분명한 사실을 선명하게 확인했다. 우리 개개인은 비록 사실상 ‘무명씨’일지라도, ‘무명씨’가 서로의 이름을 묻고 이름을 찾음으로써 조각보를 이루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기록될 수 있음을. 그리고 그 ‘무명씨’가 조각보를 구성하는 한 우리의 영향력은 소수 유명인의 영향력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3년 동안 ‘인물 조각보’의 소재를 제공해주신 여러 ‘무명씨’ 그리고 ‘인물 조각보’를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인물 조각보’ 연재를 마치고 새해엔 다른 제목의 칼럼으로 뵙겠습니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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