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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사건으로 인해 온 나라가 때아닌 샤머니즘 열풍에 휩싸였다. 나라 밖 언론조차 한국이 샤머니즘에 빠졌다고 보도할 지경이다. 국정을 농단한 자들을 처벌하고 이를 방조 또는 주도한 대통령을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과 별도로 이 기회에 샤머니즘에 대해 제대로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지금 언론과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샤머니즘이라는 단어는 하나같이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21세기에 샤머니즘이라니? 어이상실!” “우리가 그럼 무당X을 받들고 있었다는 거임?” 등이다. 여기서 샤먼은 인민을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무당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샤머니즘이 ‘나쁘고 사악한 것’이라고 사람들의 뇌리에 일방적으로 각인되는 게 문제이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겠다. 이 나라는(북한 포함) 태고 이래로 지금까지 한번도 샤머니즘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고, 지금도 가장 강력한 종교 또는 신앙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자격증 따기가 쉬운 개신교의 목회자가 13만명인 데 비해 무당의 수는 20만명이 넘는다고 하니 그 방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샤머니즘은 한국인의 기저신앙(基底信仰)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부끄러운 것은 샤머니즘을 빙자하여 온갖 악행과 기행을 일삼는 무리들이다.

한국 기독교가 세계 기독교 역사에 유례가 없는 발전을 기록하고 수많은 신자를 거느리게 된 것도 사실은 샤머니즘에 기댄 측면이 크다. 애초에 기독교가 들어올 적에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사용했던 주재신인 ‘하느님’을 ‘하나님’으로 고치고, 샤머니즘의 기복신앙과 무당의 역할마저 기독교식으로 포장해서 큰 성공을 거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도시의 대형교회 목회현장을 가보면 과연 목사와 무당의 구별이 가능한지 모를 정도로 무속적 요소가 풍부하다. 시골은 동네마다 작은 교회가 무수히 많은데 대부분 신자가 글도 잘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다. 과연 이분들이 기독교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

박정희는 1960~1970년대에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미신 타파의 명목으로 전국에 있는 당집과 점집, 성황당과 기도처, 도사굴을 모조리 파괴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기독교이다. 갈 곳이 없어진 시골의 노인들이 교회를 다니고는 있지만 신앙의식은 태곳적부터 내려온 샤머니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독교에 스며든 샤머니즘이 부끄러운 일일까? 이 역시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외래 종교는 현지에 들어와 나름의 변용 또는 습합의 길을 걷는다. 기독교 역시 중동에서 태어나 유럽이라는 낯선 곳에서 습합과정을 거쳐 서양 기독교가 확립된 것이다. 서양 기독교는 제국주의 시절 제3세계에 들어가 현지화되면서 다양한 퓨전 기독교를 만들어낸다.

샤머니즘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영(靈)’이 있으며,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영들이 노니는 한 마당이다. 무당은 인간과 영의 세계를 연결해주는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제정일치 사회였던 고대에는 한 사회 또는 부족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샤머니즘의 기능은 치유, 해원, 점복 등 인간사의 모든 것에 관여하는데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치유이다.

오늘날 서구사회에서 샤머니즘이 다시 주목을 받는 이유는 망가진 지구생태계를 다시 살려내는 데 샤머니즘의 치유 기능이 주효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무당이 굿을 하면 다 되는 걸로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무당은 단지 영의 세계와 인간 사이에 메신저 역할을 할 뿐이다. 눈앞의 현실에 목매여 사는 인간들에게 영의 세계의 관점을 전달함으로써 ‘행동’을 촉구하거나 영의 세계에 참여하여 함께 노닐도록 ‘권유’한다. 예를 들어 새만금 갯벌 매립사업 때 해안가에서 해원 상생굿이 벌어졌는데, 갯벌에 사는 뭇 생명들의 영혼에 보내는 위로인 동시에 인간이 무수한 작은 생명들과 사이좋게 공존할 것을 권유하는 메시지였다.

지금 한국 정치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망령된 주술사의 사술에 빠진 몇몇 아녀자의 국정농단을 징치하는 것이지 샤머니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예로부터 영계를 드나드는 사람이 사심을 가지면 능력을 잃는다는 얘기가 있다. 영계는 엄격하여 일체의 사심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 영적 능력은 사라지고 사술만 남는다. 그러나 대중은 그것이 영능인지 사술인지 분간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숱한 폐단이 속출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한 나라의 정상권력에 있는 사람이 이러한 사술에 빠져있었다면 그 위험성은 말할 나위가 없다.

언젠가 식물학에 조예가 깊은 영국의 찰스 황태자가 공식석상에서 식물의 정신적 차원을 얘기했다가 다음날 언론으로부터 뭇매를 맞은 일이 있었다. 공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것을 함부로 얘기했기 때문이다.

현실은 비현실 위에 떠 있는 조그만 섬에 불과하다. 비현실은 상상 너머의 세계이므로 대중은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들의 농간에 쉽게 놀아날 수 있다. 이것이 이성의 정치가 요구되는 이유이자 성과 속의 분리가 필요한 이유이다. 하지만 하나의 세계관 또는 종교관으로서 샤머니즘의 가치는 매우 크다. 특히 물신주의가 지배하는 생태 위기의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화가 난다고 하여 사술과 샤머니즘을 구분하지 못하고 우리 민족의 소중한 가치관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아니 될 일이다.

황대권 | 생명평화마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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