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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우보(牛步) 민태원이 ‘청춘예찬’을 쓴 때는 일제강점기였다. 나라를 잃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있던 이 땅의 청춘들을 위한 헌사가 ‘청춘예찬’이다. 우보는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라고 썼다. 우보는 투명한 얼음과도 같은 이성보다,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과 같은 지혜보다 청춘이 갖춰야 할 필요충분 조건은 끓는 피와도 같은 열정이라고 했다. 그런 청춘의 피가 끓지 않고 얼음에 싸여 있다면 죽어 있는 만물과 다를 바 없다고도 했다.

시대의 명문(名文)으로 꼽힌 우보의 ‘청춘예찬’은 세대를 이어가며 청춘들의 가슴을 덥혔다. 요즘 젊은 세대도 우보의 글을 읽으며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듣고, 그 어떤 바윗덩이도 굴리며 앞으로 나아갈 것 같은 힘이 온몸을 휘감는 느낌”(시인 고은)을 받을까. 딱히 그렇지는 않을 듯하다. 되레 청춘에 대한 ‘예찬’은 없고 좌절과 상실감을 안겨주는 현실에 분노하는 게 젊은 세대다.

지난주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청년 간담회’에 참석해 대학생과 취업준비생의 절박한 얘기를 들었다. 한 취업준비생은 “대기업만 고집하지 말고 눈높이를 낮추라는 어른들의 얘기는 ‘폭력’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그러자 이 장관은 “중소·중견기업에서 폭넓게 경험하는 것이 꿈을 실현할 가능성이 크다”고 조언했다. 고용정책을 총괄하는 주무부처 장관의 조언을 들은 취업준비생의 속내가 궁금했다.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다시 부여잡는 계기가 됐을까, 아니면 주변에서 흔히 듣던 ‘영혼 없는 조언’으로 치부했을까.

이 장관은 스펙 쌓기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대학생에겐 “너무 두려워 말라. 그동안 공부한 방식대로 하면 된다”는 답변을 내놨다. 간담회 참석자들에겐 “여러분의 미래가 대한민국의 미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젊은 세대는 ‘청년이 미래다’라는 말에 위로가 아닌 상처를 받곤 한다. 미래로 가는 문을 굳게 닫아놓고는 “두드리면 열리리라”고 하거나, 자전거 바퀴에 바람이 빠졌는데도 울퉁불퉁한 길을 빨리 달리라고 채근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그래도, 그 시절이 좋았다”는 말을 싫어한다. 때론 혐오하기도 한다. 그런 젊은 세대에게 “어제가 없었다면 오늘도 없을 것”이라는 훈계는 고리타분하다. ‘꼰대’라는 비아냥을 듣기 십상이다. 기성세대들이 추억하는 ‘그 시절’은 젊은 세대에겐 “그래도, 지금보다는 나은 시절”일 수 있다. 젊은 세대들은 과거에 기대 현재를 해석하거나 비교하는 것에 진저리를 친다. 그런 그들을 ‘철딱서니 없는 청춘들’로 힐난해선 곤란하다. 젊은 세대들은 1970~1980년대만 해도 대학졸업장만 있으면 취업은 일도 아니었던 기성세대가 겪은 ‘그 시절’을 함께 추억하거나 공감할 여유가 없다. 숨조이는 경쟁만이 존재하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는 것조차 버겁기 때문이다.

'아픈 청춘'의 희망 만드는 청년유니온 (출처 : 경향DB)


지난달 청년(15~29세) 실업률은 11.1%다. 1999년 7월 이후 15년7개월 만에 최고치다. 청년 실업자수는 48만4000명으로 50만명에 육박한다. 정부는 연간 1조원을 청년취업을 위해 지원하고 있다지만 고용시장에는 찬바람만 불고 있다. 기성세대가 타고 올라갔던 사다리는 걷어차인 지 오래다. 사다리 대신 ‘스펙’ ‘비정규직’ ‘열정페이(열정+급여)’ ‘88만원’ ‘시급(時給)’ ‘최저임금’ ‘오포(연애·결혼·출산·인간관계·집마련 포기)세대’ ‘미생’ ‘고용절벽’ 등 신조어만 난무하고 있다.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주눅 들고 좌절하는 청춘들을 한 일간지는 ‘달관세대’로 칭했다. 일본의 ‘사토리(さとり·깨달음) 세대’를 본뜬 신조어다. 사토리 세대는 일본 경기침체기에 태어나 취업과 돈벌이, 출세에 관심이 없는 세대를 일컫는다. ‘달관세대’는 정규직 취업이 어려우니 비정규직으로 적게 벌고, 적게 쓰는 게 낫다고 여기는 세대라고 한다. 청춘들이 세상에 달관하고, 안분지족(安分知足)의 깨달음을 얻었다니, 느닷없고 황당하다. 발버둥치며 기를 쓰고 해봤자 안되니 분수를 알고, 초탈하며 살라는 얘기인가.

달관은 ‘포기’의 또 다른 표현이다. 도전, 열정, 패기 대신 ‘포기’를 강요하는 ‘달관세대’라는 신조어는 100만부 넘게 팔린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 제목보다 더 지독한 청춘에 대한 악담(惡談)일 수 있다. ‘불안하고, 막막하고, 흔들리고, 외로우니 청춘이고, 아프니까 청춘이니’ 참아야 한다는 뜨악한 논리보다 젊은 세대에게 더 깊은 생채기를 남길 수 있는 악담인 것이다.

우보의 ‘청춘예찬’에 가슴을 덥힐 수 없는 청춘들에게 <개그콘서트>에서 ‘용감한 형제팀’이 부른 노랫말을 되새겨 보라면 어떨까. “한숨 대신 함성으로! 걱정 대신 열정으로! 포기 대신 죽기 살기로!” 그게 청춘에 대한 악담이 아닌 격려일 수 있다.


박구재 기획·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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