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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문재인 대통령의 성공적인 국정운영을 바라는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조언과 제언을 아끼지 않을 지금, 페미니스트 예술가이자 성소수자 인권운동가 조이 레너드의 선언문적 시 ‘나는 이런 대통령을 원한다’를 떠올려본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 시를 읽어보았기를, 그리고 그 뜻을 새겨보는 노력을 했으면 한다. 이 시는 조지 부시, 빌 클린턴, 로스 페로라는 세 명의 ‘알파메일’(alpha male)이 격돌했던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군소 여성 후보 아일린 마일즈를 지지하던 조이 레너드가 쓴 것이다. 시는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는 바람으로 시작한다.

레너드는 서두에서 마일즈 후보가 동성애자였다는 점과 더불어 1980~1990년대 에이즈 충격의 여파에 성소수자 공동체와 예술계가 입은 상처를 상기시키지만, 마일즈 개인과 성소수자 공동체를 가리키는 데서 나아가 다양한 소외 집단과 서민, 빈민에 대한 최고 정치지도자의 진심 어린 공감, 폭넓은 지원을 요청한다. 시인은 에이즈로 연인을 잃은 사람,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환자, 성폭력에 노출된 여성, 혐오범죄에 시달리는 성소수자와 소수인종, 강제추방을 두려워하는 이민자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소외된 자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해하고 흔히 국정운영이라는 거대 담론의 최우선순위에 오르지 않는 사회의 구석구석을 살펴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절절한 표현이다. 이 시는 2010년 스웨덴 극우세력이 의회에 진출하자 이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이 공개 낭독했으며, 유럽 여러 나라들의 반파시즘, 반극우 시위에서 낭독되었고, 2012년 사르코지와 올랑드가 맞붙었던 프랑스 대선을 앞두고 파리에서 예술가들과 페미니스트들이 낭독한 바 있다. 2016년 미국 대선 전에도 뉴욕시 중심가에 대형 간판으로 제작되어 나붙었다.

서구권에서도 이 시가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는 그 사회에서도 아직 여성 및 소수자가 정계에서 이해관계를 대변할 가능성이 낮고, 권력과 재화의 불평등한 분배가 야기하는 갈등, 그리고 성적, 인종적 소수자의 인권 보장이 여전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남성중심적 정치구조, 기득권층 중심의 정책 위주로 움직여온 우리 사회에서 권력 편향, 소외계층과 인권의 문제는 심각하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13명의 최종후보들 중 단 1명만이 여성이었고, 5명의 주요 정당 후보들 중 4명은 영남지역 출신의 엘리트 남성들이었다. 토론회와 선거운동 과정에서 여성과 소수자 인권에 대한 일부 대선후보들의 인식의 한계가 여과없이 드러나 국가 지도자들의 성평등, 젠더감수성의 수준에 대해 큰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4월25일 토론회에서 심상정 후보를 제외한 후보들이 명시적 혐오에서부터 무관심한 침묵에 이르는 상징적 폭력으로 동성애를 다루는 모습은 TV토론회의 시청자들을 당혹하게 했고 상처를 주었다. 문재인 당시 후보는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서 사전 준비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평등 대통령이 되겠다”고 서약한 그가 대선후보 토론장에서 동성애에 대한 사적인 반감을 표명했던 것은, 성소수자 인권이 얼마나 중요한 사안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다음날에 동성애는 찬반의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교과서적 답변과 군대 내 동성애에 제한된 입장을 공식 발표했으나, 그날 토론회의 발언은 그의 지지층에 뚜렷한 균열을 일으켰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원했던 과반득표에 이르지 못한 원인들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새 대통령으로 선출된 그에게 25년 전 레너드의 시를 새겨볼 것을 권하는 이유는, 그에게 학습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며, 민심을 받들고 소통하며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그의 약속을 믿고 싶기 때문이다.

‘레즈비언’ 대통령과 ‘흑인여성’ 대통령을 바란다는 레너드의 시는, 최소외계층의 이해관계가 정치에 반영되기를 바라는 수사적 표현이다. 레너드의 시에서처럼 소수자에 대한 배려는 확장될 수 있으며 확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시가 명시적으로 지시하는 여성과 성소수자의 현실에 대한 인식을 환기할 필요는 분명하다. 일자리, 안보, 경제 등 새 대통령이 살펴야 할 일은 끝없이 많지만, 그가 공언한 바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는 성평등과 소수자 인권을 지금보다 신장시키지 않고는 이끌어낼 수 없다. 사회적 합의나 지지율이라는 명분 뒤에 숨지 말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 2016년 5월, 그는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며 “다음 생에선 부디 남자로 같이 태어나요”라는 어느 포스트잇의 문구를 트위터에 인용했다. 내각의 30%를 여성으로 임명하고 그 비율을 늘린다는 공약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도 나는 그의 임기 동안에 내각에 들어가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망연히 다음 생에서 이성애자 남성으로 태어나기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길 간절히 바라기에, 그가 ‘레즈비언 대통령’의 마음을 가져보는 노력을 해 주기를 바란다.

윤조원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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