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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치유재단이 마침내 해산되었다. 2015년 12월28일 한·일 외교부 장관 합의(이하 2015 한·일 합의)에 따른 후속조치로 2016년 7월28일 설립되었으니 3년여 만이다. 절차와 내용은 물론 형식적 정당성마저 결여한 2015 한·일 합의의 부산물, 범죄사실 인정, 공식사죄, 진상규명, 법적배상 그 어느 것도 보장받지 못한 채, 일본 스스로 “잃은 것은 10억엔뿐”이라던 그 치졸한 돈을 ‘치유금’이라는 명목으로 받아 만든 재단, 그리하여 피해당사자는 물론 활동가, 양식 있는 세계 시민들을 공분시켰던 재단, 고(故) 김복동 할머니가 암 투병 중에도 해산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감행했던 바로 그 재단이다.  

작년 11월 재단 해산 방침이 공식 발표된 후, 여성가족부는 올해 6월17일 화해·치유재단의 등기부상 해산 절차를 신청했고, 7월3일 완료 통지를 받았다고 밝혔다. 채권·채무 관계, 고용관계와 사무실 계약 종료 등 최종 청산 절차를 걸쳐 등기까지 말소되는 데는 시간이 더 걸릴 터이고 남은 재단 잔여기금 처리 또한 과제로 남았지만, 어쨌든 법적 성격이 청산법인으로 바뀌게 되었으니 재단법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셈이다. 

재단 해산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7월5일, 대한민국 언론들은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를 쏟아냈다. “화해·치유재단 해산, 일본 경제보복 확대 방아쇠 되나”, “ ‘화해·치유재단 해산’ 한·일 갈등 새 ‘뇌관’으로”, “이 와중에 ‘위안부재단’ 해산 절차 시작…日 ‘수용 못한다’ 반발”, “벼랑 끝 한·일관계 새 뇌관…‘화해·치유재단 해산’ 日 반발”, “ ‘朴정부 때 설립한 화해·치유재단’…韓, ‘日에 통보 없이 정식해산’ ”, “갈등 속에 나온 ‘화해·치유재단’ 해산 소식…日 발끈”, “日, 화해·치유재단 해산에 보복 준비…‘수출규제 버금’ ”….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9월25일(현지시간) 미국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만나 화해·치유재단을 사실상 해산하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 환영 일색으로 나왔던 당시 언론의 태도와는 너무도 상반된다. 집단기억상실증에라도 걸렸단 말인가.  

이들 간에 관통하는 공통점은 첫째, 한·일 경제충돌, 혹은 일본의 경제보복이란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역사를 부정하고 불필요한 갈등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었던 화해·치유재단은 갑자기 갈등 해소를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 할 대상이 된다. 해산은 ‘양국 간 갈등에 기름을 붓는 뇌관’이 된다. 둘째, 기사의 주요 관심사는 일본 정부의 반응이다. 시작도 끝도 일본 정부다. 화해·치유재단과 2015 한·일 합의의 근본적인 문제, 이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 당사자들과 활동가들의 노력은 안중에도 없다. 한국 정부는 수세적 위치에 잠깐 등장한다. 셋째, 대부분 기사의 모태는 연합뉴스 일본 특파원의 아사히신문을 인용한 단신 기사다. 주장의 주요 근거는 아사히신문 보도와 니시무라 야스토시(西村康稔) 일본 관방부 부장관의 정례브리핑이다. 소수의 언론사를 제외하곤 일본 정부의 협박성 발언이 강렬하게 전달되는 대신 대한민국 시민사회, 당사자의 반응이 소거된 이유다. 이들은 모두 일본의 시점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짐짓 한국 경제를 염려하며 재단 해산의 시의성을 따지는 기사들의 최종 과녁은 화해·치유재단이 아니다. 국가 간 신의를 깨고 2015 한·일 합의를 어긴 것은 한국의 문재인 정부다. 공교로운 시점에 ‘확전의 방아쇠’를 당긴 주체도 한국 정부다. 불필요한 행동, 혹은 ‘통보’도 없는 무례한 행동으로 일본 정부의 심기를 건드려 경제보복의 빌미를 제공한 것도 한국 정부다. 트러블 메이커다.

2015 한·일 합의를 지지하고 문재인 정권을 공격함으로써 무슨 이익을 직접적으로 얻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실질적인 이해관계가 있거나 숨겨진 의도가 있지도 않을 것이다. “화해·치유재단 해산이 한·일관계 악화에 기름을 부었다”던 한 학자의 발언이나, “어려운 합의를 도출해냈는데 대한민국 정부가 뒤집어서 지금 이렇게 한·일 간 국교가 굉장히 어려워졌다”던 김무성 의원의 최근 발언을 상기해 보자. 한·일관계 악화라는 문제의 근본 원인을 ‘무의식적’으로 가리는 사이, 식민지 지배 책임은 희미해진다. 식민 지배국의 거만한 위치는 포스트식민 공간에서도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겨우 2015년 12월28일 이전으로 시계를 돌렸을 뿐이다. 1910년 아니, 1945년이 결과한 무게는 감히 건드리지도 못하고 있다. 식민지 유령은 그렇게 끈질기게 우리 곁을 맴돌거늘, ‘일부’ 한국의 위정자와 언론은 어느 시공간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며, 누구와 동일시하고 있는가.

<이나영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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