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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기고]진실 뒤의 정치

opinionX 2016. 10. 27. 14:55

미국의 사회학자 랄프 키즈는 2004년 사회생활에서 진실과 신뢰가 실종되어 부정직과 기만이 판치는 점에 주목해 <진실 뒤의 시대>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진실 뒤’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들춰 냈다.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롬니는 ‘진실 뒤의 정치’ 수법을 구사하며 오바마를 비판했다. 이것은 2016년 미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 후보가 행한 여러발언의 모델이 됐다. 그리고 2016년 영국에서 유럽연합(EU) 탈퇴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이탈파는 ‘진실 뒤의 정치’를 내걸어 일정한 지지를 얻었고 관철됐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짓이 남길 후과를 생각해 보지도 못한 채.

완벽한 거짓은 완벽해 보이는 진실 뒤에 숨어 있다. 그래서 우리 눈앞에 보이는 진실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진실이 숨겨지는 것이다. 미국 정치에서 ‘진실 뒤의 세계’는 2004년이나 2010년 즈음에만 나타났다고 볼 수 없다. 2001년 9·11 이후 부시 정권에 의한 아프가니스탄전쟁이나 이라크전쟁은 문자 그대로 ‘진실 뒤의 세계’의 사건이었다. 부시는 9·11을 구실로 한순간에 전쟁광들이 그렸던 세계전략을 구사했고,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집을 잃고, 난민이 됐다. 이런 진실과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1968년 8월4일 베트남전쟁으로 비화된 통킹만 정보조작 사건을 떠올릴 수 있다. 이처럼 미국의 정치는 종종 ‘진실 뒤의 세계’에 있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10월25일 (출처: 경향신문DB)

일본 게이오대 호소야 유이치(細谷雄一)는 “일본 정치가 이상해졌다”면서 ‘진실 뒤의 세계’에서는 ‘허위가 일상에 침투해 진실은 무력화된다’고 지적했다. 지금 일본의 정치 세계에서는 아베 총리가 허위를 말해도 검증되지 않고 비판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아베의 안보정치는 야당의 비판을 받으면서도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제 정치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거짓말을 하고 나서도 ‘과장’이라고 변명하고, ‘잘못 말했다’고 눈가림 사과만 하면 넘어갔던 것이다. 정치가 정의를 실현하는 게 아니라 허위를 선동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고 일상화하는 것이다. 공포를 선동하는 전략을 선택해 건설적인 정책 논쟁의 기회를 포기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헌법 개정을 거론했으나 거부 의사를 보였던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임기내 개헌 관철이라는 국면전환용 초강수를 내보였다. 개헌 이유는 논외로 치고 이런 정치변화의 주도권을 손에 쥐려는 사실의 이면에 무엇이 숨겨있는지 읽어내야 한다. ‘진실 뒤의 정치’를 강행하는 반민주주의적, 반헌법적 의도를 적나라하게 캐내야 한다. 대통령이 민생안정과 경기회복, 북핵 위기관리라는 제 할 일을 제쳐두고, 왜 국민들을 또다시 ‘정쟁의 홍수’에 빠트려 놓으려고 하겠는가? 바로 대통령 주변의 부정부패와 비리를 덮으려는 게 아니었겠는가.

당장 한국정치에서 기만과 허위의 정치가 아니라 ‘진실 뒤의 세계’가 없었음을 증명하는 일은 불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실 뒤의 세계’를 없애려는 집요하고 꾸준한 정치실천, 바로 의회민주주의의 진화와 부활을 촉구한다.

허상수 지속가능한사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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