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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학의 발전을 믿고 의사의 전문성을 존중한다. 병원의 세련되고 복잡한 기계들에 경탄하며, 매년 받아보는 건강진단 결과표는 늘 경건한 마음으로 정독한다. 외래 진찰실에라도 가는 날에는, 의사 선생님의 말 한마디라도 놓칠까 긴장하고 집중한다.

하지만 잘 알고 있다. 항상 오진의 가능성은 있으며, 첨단 의술도 시간이 지나서 보면 엉뚱한 시도로 판명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맹독성 수은을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했던 때가 있었고, 관상이나 머리 모양으로 사람의 성격과 병을 판단하려 했던 관상학과 두개학이 있었다.

조금 더 최근 사례로는, 동성애를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1974년에야 미국정신의학협회는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제외했고, 세계보건기구(WHO)가 성적 지향과 정신적 장애가 무관하다고 규정한 것은 1993년이었다.

WHO는 오는 5월 국제질병분류 11차 개정판을 내놓을 예정인데, ‘인터넷게임장애(IGD)’를 정신건강질환으로 분류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게임장애 증상은 ‘적절한 게임 플레이 시간 조절 불가’ ‘게임과 여타 행동의 우선순위 지정 장애’ ‘게임으로 인한 부정적인 결과 무시’ 등을 지칭한다. 이 같은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을 정신질환자로 분류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의학적 성취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의사 개개인이 출중한 전문적 능력과 높은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더라도, 집합적 개념으로의 의학계나 의학 관련 단체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리곤 한다.

WHO의 잠정적 결정에 대해 이미 수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게임장애’라는 개념이 비학술적이라는 지적부터, 과다한 게임 플레이를 정신질환으로 볼 수 없다는 실증적 연구 결과들도 축적되었다.

예를 들어 정신건강의학 전공의 한덕현 교수는 게임으로 문제가 되는 사람의 75%는 우울증, 57%는 불안장애, 60%는 강박증을 보이는 등 공존질환이 워낙 많기 때문에 순수한 게임장애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심리학자인 빈(Bean) 교수 등은 게임 중독이 “병리학적 정신 장애로서 안정적인 구조와 높은 수준의 임상적 손상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물질 남용 연구’에 근거를 두고 있는 WHO의 제안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WHO의 실무팀이 의사 결정 과정에 ‘정치적’ 압력이 작용했음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특히 ‘아시아 국가의 관련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압력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누가 왜 압력을 가하면서까지 게임을 질병으로 만들려 하는가?

“누가 왜?”라는 질문의 대답은 일단 유보하기로 하자. 대신 WHO의 ‘국제질병분류’라는 작업 자체가 전문적이고 윤리적인 의사 선생님들의 환자를 위한 순수한 마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만 확인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환자의 양산이다. 15만명의 환자가 새로 생길 것이라는 추산도 있고, 자발적 게임 관련 정신질환자가 되어 군대를 면제받는 경우도 생길 것이라는 농반진반의 예상도 있다. 게임 행동의 병리화가 오히려 치유적 환경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는 타당하다.

빈 교수와 동료들의 연구 논문은 IGD 증상들의 행동 기원에 대한 문화적이고 현상학적인 이해가 부재한다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정신의학 전문가들의 선의를 믿는다하더라도, 진단-치료라는 의학적 사고가 결국 현상의 역사적, 거시적 이해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게임 장르나 플랫폼의 차이에도 무관심하고 게임 문화나 가상세계 내의 상호작용 등을 고민하지 않은 채 내리는 진단은 200년 전의 두개학과 골상학을 반복하는 짓일 뿐이다. 의학보다는 인류학, 문화연구, 미디어연구 등이 더 적실성을 갖는다.

인간은 재미를 추구하기 마련이다. 과거에 만화나 텔레비전이 그랬듯 게임은 사람들에게 재미를 제공한다. 재미있다고 과도하게 즐기면 건강에도 미래에도 좋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운동도, 독서도, 여행도 너무 많이 하면 부작용이 생긴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놀이나 행위나 대상에 정신없이 빠졌다가 자발적 회복이 이루어지는 경우들을 모두 정신질환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소위 ‘덕후’들을 ‘치료가 필요한 환자’라 명명하고 규정짓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게임산업이 우리나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굳이 거론할 필요는 없다. 게임을 잘만 사용하면 교육적 효과를 낼 수도 있다는 주장 또한 부차적이다. 이런 이유로 게임을 상찬하는 것은 옹색하다. 그냥, 작은 즐거움을 찾거나 자투리 시간을 때우는 행위를 질병의 전조나 사회적 병폐로 보지 말자는 제안으로 족하다. 게임을 하면서까지 의사 선생님의 눈치를 봐야 한다면 너무 슬프지 않겠는가.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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